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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해평 길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5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여말삼은의 한 사람인 야은 길재. 그가 해평길씨의 정신적 기둥.
길씨의 시조는 고려 문종때 정당문학의 벼슬을 지낸 길연이다.
그는 지나(당)에서 한국에 귀화해온 이른바 「팔학사」(홍천하, 은세통, 목시, 위령, 방부, 기모, 봉수현)의 한 사람으로 전한다. 지금의 선산당인 해평백에 봉해짐으로써 해평을 본관으로 쓰게된 것으로 길씨의 족보는 전한다.
대부분의 성씨들이 그렇듯이 해평길씨 역시 길연이후 1백여년가량 세계가 멸실돼 야은의 증조부인 길시우(생원)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6할이상 북한거주>
시우의 아들 보는 산원국정을 지내고 그 아들 원진에 이르러 중정대부금주지사를 지냄으로써 길문이 야은같은 거인을 잉태할 채비를 갖추었다.
해평길씨는 시조로부터 7대를 내려오는 동안 전국으로 퍼져 파가 나뉘게 되는데 전체 길씨중 6할이상이 북한에 사는 것이 특징. 남한에만은 5만명으로 성별인구순위 71위.
길씨네의 자랑스런 조상일 뿐 아니라 우리 역사상 우뚝한 거신야은 길재는 우리 유학의 정통을 세운 사림의 비조.
길승·길승필·길승연등이 가담, 활약했다.
근대의 인물로는 영계 길선주 목사가 가장 알려진 이름. 1897년(광무1) 기독교인이 되어 세례를 받고 이해 안창호등과 독립협회 평양지부를 조직했다. 평남안주출신인 그는 1907년 방기창·양전백·서경조등과 함께 평오신학교를 졸업한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중의 한사람. 그는 교육사업에도 힘써 숭덕학교·숭실학교를 설립했고 3·1운동때는 기독교 대표로 33인중의 한사람이 되기도 했다.

<조선조 영화 못누려>
또 지난1일 별세한 교육계의 원로 길영희옹도 길문이 배출한 인물.
이밖에 김홍일장군의 광복군에서 활약한 길창일도 있다.
해방 후 인물로는 미군정의 체신국장을 지낸뒤 6·25때 납북된 길원봉, 일본 수산전문학교출신으로 한일회담때 수산분야 전문위원으로 참석했던 고길항진, 제주도지사를 지낸 고길성운, 전서울시 경국장 고길경복등이 있다.
현재도 길문에서는 많은 인재들이 각계에서 고루 활약하고 있는데 정치가로는 5·16혁명의 주체로 공화당 사무총장을 지낸 길재호와 길전식, 대한약사회 회장 길병전(이상 모두 전국회의원)이 있고 학계에 길승흠(서울대 정치과), 길현익(서강대)교수등이 있다. 법조계에는 길기봉판사(수원지법), 길기수, 길영기변호사, 언론계에는 길종섭(KBS정치부장), 길종휘(KBS아나운서)등이 활약중. 이밖에 길창익(합동영화공사사장), 길창덕(만화가), 길성연(영등포교도소장), 길육(치안본부경무감) 등도 길문을 빛내고 있는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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