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식의 레츠 고 9988] “호스 매달고 떠나기 싫다” … 존엄사 서약 한해 2만8000명

중앙일보

입력 2015.04.10 00:54

업데이트 2015.04.10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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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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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이 배포하는 의향서. 인공호흡 등을 받을지 여부를 표기한다. [박종근 기자]

최근 타계한 리콴유 싱가포르 전 총리는 2013년 자서전에서 “내가 움직이지 못하고 인공튜브로 연명하게 되면 의사들은 나를 떠나도록 허용해야 한다”며 무의미한 연명 의료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연명의료를 받지 않고 편히 눈을 감았다. 리콴유 총리는 이런 뜻을 공식 문서로 남겼다고 한다. 일종의 사전의료의향서(Advance Directives)다.

 국내에도 존엄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전의향서를 쓰는 사람이 늘고 있다. 임종이 임박했을 때 인공호흡·심폐소생술·혈액투석·항암제 투여 등의 연명의료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은 문서다. 주로 건강할 때 작성한다. 사단법인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대표회장 노연홍 전 청와대 고용복지수석, 이하 사실모)’이 의향서 작성 운동을 주도한다. 사실모에 따르면 하루 30~40건의 상담 전화가 온다. 지난해 5344건의 전화 상담이 이뤄졌고 사전의향서 4만 부가 배부됐다. 사실모 홍양희 공동대표는 “의향서를 가져간 사람의 70%가 실제로 작성한다”고 말한다. 지난해 2만8000명가량이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2011년 2만2970명이 작성한 이후 조금씩 늘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 김모(70·여)씨는 1년 전 위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그동안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나 암에 걸리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 우연히 사전의향서를 알게 됐다. 김씨는 “ 의료기기에 둘러싸여 생을 마무리하고 싶지 않다”며 “의향서를 남김으로써 가족의 부담을 덜어주는 게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사전의향서는 대부분은 가족·친지 등의 연명의료 고통을 본 뒤 결심한다. 사실모가 의향서 작성자 102명을 설문 조사해 보니 친구나 가족이 연명치료를 받고 죽는 것을 보고 나서 작성했다는 사람이 58.8%였다. 사실모는 9514명의 의향서를 보관 중인데, 이 중 70대가 47%로 가장 많다. 60대, 80대 순이다. 인천시 남동구 손모(71)씨는 암에 걸린 아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인공호흡기를 달고 숨지는 것을 보고 의향서 작성을 결심했다. 그는 “인공호흡기나 혈액투석, 혈압 상승 약물 투여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의향서를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경북 문경시 김정배(59·경북웰다잉연구센터장)씨는 2011년 5월 어머니(82)에게 사전의향서를 쓰도록 권했다. 김씨 부부는 6개월 전 이미 작성한 상태였다. 어머니는 “마지막에 코에 영양공급 호스를 끼워서 어쩌겠다는 거냐. 쓸데없는 치료를 하지 말라”며 의향서를 작성했다. 2년여 뒤 심한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몇 차례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가라” “뇌 색전술을 하자”고 제의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요양원으로 옮겼다. 김씨는 “어머니가 병원에 있을 때는 몸이 퉁퉁 부었는데 요양원으로 옮기니 거짓말처럼 좋아졌다”며 “연명의료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사전의향서의 법적인 효력은 없다. 근거가 되는 연명의료 중단 법제화(가칭 임종과정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작업이 중단돼서다. 이 때문에 의료진이나 가족들이 의향서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자녀들이 ‘끝까지 진료’를 주장하기도 한다. 2013년 국가생명윤리위원회가 존엄사 법제화를 권고한 뒤 사전의료의향서를 환자 의사 결정 장치로 활용하고 관리기구를 설립하도록 하는 법률 시안을 만들었지만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다.

 의향서는 이미 연명의료를 시작했을 때는 힘을 못 쓰지만 시작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의사와 가족이 의향서를 인정할 때만 그렇다. 웰다잉 강사 유명숙씨는 “자녀 모르게 작성하지 말고 의향서를 작성하려는 뜻을 자녀에게 잘 설명해야 한다”며 “‘끝까지 치료는 받되 회복 불가능한 상황이 오면 의향서대로 해 다오’라고 당부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또 자주 가는 병원의 의사에게 알려 진료카드에 첨부해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사실모 홍양희 공동대표는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 하루 빨리 입법화돼야 의향서가 더 확산되고, 나아가 연명의료로 인한 국가적 손실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글=신성식 복지전문기자 ssshin@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사전의향서 작성하려면=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상담실(02-2281-2670)로 전화해 절차를 문의하면 의향서 양식을 우편으로 받을 수 있다. 홈페이지(www.sasilmo.net)에서 내려 받을 수도 있다. 부산·울산·전주 등 전국 13곳의 사실모 협력기관을 활용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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