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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의 취리히통신] 스위스 부모들 "아이가 네 살만 되면" 주문 외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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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옆집에 사는 릴리(30), 폴(31) 부부 집에서 얼마 전 둘째 제임스가 태어났습니다. 아기가 건강하고 첫째가 동생을 잘 돌봐줘 릴리 부부는 지금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릴리의 단 한 가지 고민은 육아휴직이 끝난 이후의 일입니다. 릴리는 출산 전부터 제약회사에서 주 3일 파트타임으로 일해 왔습니다. 파트타임이라도 급여가 적지 않고 남편 폴 또한 보험회사에서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지만 이 부부에게도 두 자녀의 어린이집 비용은 만만찮습니다. 릴리는 “두 아이를 주 3일 어린이집에 보내는 비용과 내 파트타임 급여가 비슷하다 보니 일을 계속 할지 고민된다”고 했습니다.

 대체 스위스 어린이집이 얼마나 비싸길래 싶으실 겁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014년 가족 통계를 볼까요. ‘유아 데이케어 비용이 평균임금에서 차지하는 비중’ 항목이 있습니다. 1위는 단연 스위스로, 아이 한 명을 어린이집 종일반에 보내는 비용이 평균임금의 67%를 차지합니다. 월급이 100만원이라면 어린이집 비용이 67만원이란 얘깁니다. 정부 지원금과 세금 공제액을 빼고 난 금액(개인 순부담액)도 임금의 30%에 이릅니다. 실제로 취리히 어린이집 종일반 비용은 평균 2500스위스프랑(약 286만원)으로, 아이 한 명당 정부 지원금 200스위스프랑(약 23만원)으론 어림도 없습니다. 어지간한 직장에 다녀서는 어린이집 종일반은 손 떨려서 꿈도 꿀 수 없죠. 부모 중 한 명이 풀타임 직장 근무를 포기하는 비중이 높은 건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통계에서 개인 순부담액이 0원에 수렴하는 나라가 OECD 국가 중 딱 한 곳 있습니다. 어딘지 짐작이 가시나요? 놀랍게도 한국입니다. 이런저런 지원금을 감안하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데 부모가 실질적으로 부담하는 비용이 없다는 겁니다. 한국의 뒤를 잇는 게 스웨덴(6%), 스페인(8%), 독일(11%) 등의 복지국가입니다. ‘GDP에서 아동 양육 관련 공공지출이 차지하는 비율’ 항목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웨덴(0.085%)에 이어 한국(0.599%)이 OECD 국가 중 2위입니다. 우리가 복지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는 프랑스(0.444%), 독일(0.093%)은 그 다음입니다. 스위스(0.086%)는 거의 꼴찌 수준이고요. 이 통계만 보자면 한국은 최소한 영·유아 양육 비용 면에선 세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국가입니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의 부모 중 어린이집 원비가 저렴하고 정부 지원금이 많아 아이 키우기가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겁니다. 통계수치만 보면 여타 복지국가들보다 오히려 나은 편인데 체감하는 어려움이 더 큰 이유는 뭘까요.

 첫째로 근무환경입니다. 어린이집 종일반이라도 부모가 ‘칼퇴’를 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만족도가 달라집니다. 새벽같이 출근해 툭하면 야근인 환경이라면 종일반 비용 외에 아침·저녁으로 아이를 돌보는 비용이 추가됩니다. 스위스 최대 은행 UBS에서 일하는 친구 산드라(32)는 각각 세 살과 9개월인 남매를 어린이집에 보내는데 매일 오후 5시면 퇴근해 아이들을 데리러 갑니다. 산드라는 “일하랴, 애들 돌보랴 몸은 힘들지만 남의 도움 없이 두 가지 다 할 수 있으니 큰 불만은 없다”고 합니다.

 둘째는 근무제도의 유연성입니다. 스위스의 경우 14세 이하의 자녀를 둔 가정에서 부모 중 한쪽이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비중은 40%가 넘습니다. 주 3일만 일하고 급여도 60%만 받는다면, 이 때문에 자리가 없어지거나 승진에서 누락될 염려가 없다면, 몇 년 뒤 아이가 커서 손이 덜 갈 때쯤 풀타임 근무로 복귀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이미 유럽 여러 나라에서 안정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제도이니 환상이 아닙니다. 저출산과 노동력 문제를 한번에 잡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간접적이지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교육환경입니다. 스위스에선 아이가 만 네 살이 되기 전엔 어딜 보내도 엄청난 돈이 들지만 그 이후엔 모든 게 무료입니다. 신뢰할 수 있고 수준 높은 공교육에 돈이 들지 않으니 부모들은 “네 살만 되면”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죠. 좋은 날이 온다는 희망만 있어도 현재를 버틸 힘이 솟아나는 건 만고의 진리 아니겠습니까.

김진경 jeenkyung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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