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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어느 어머니의 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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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형경
소설가

“세계는 완전히 해체되어 버렸고, 동시에 삶이 매일 새롭게 시작된다는 환상도 사라졌다. 공부나 희망도 무의미해졌고, 어느 식당이 좋다거나 어느 색깔이 마음에 든다거나 하는 느낌도 존재하지 않았다. 질병과, 내가 그 속에 잠겨 있다고 느껴지는 죽음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인용문은 20세기 위대한 작가 알베르 카뮈의 글이다. 그가 소년기에 경험한 사건을 기술한 후 덧붙인 소회이다. 한순간 소년의 정신을 죽음만이 존재하는 곳으로 밀어 넣은 사건은 그의 어머니의 성폭행 피해 경험이었다. “어느 날 저녁 한 사내가 집에 침범하여 어머니에게 ‘난폭한 짓’을 하고 도망쳤다. 어머니는 기절했고 나는 의사가 시킨 대로 어머니 곁에서,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 밤을 지냈다.”

 성폭행 피해를 당한 후 그와 관련된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여성이 내면 증상을 아들에게 물려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남자들은 많이 놀라운 모양이다. 한 지인은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성 충동과 관련해 느껴오던 죄의식이 다소 가벼워졌다고 말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행은 물론 그녀 자신에게 가장 나쁘다. 성 충동에서 모든 정신 기능들이 파생되어 나오기 때문에 성과 관련된 폭행은 존재의 근간을 흔드는 독성이 된다.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어려움을 떠안긴다. 성과 관련된 아내의 불안·분노가 가정 공간에 흩뿌려지기 때문에 남편 입장에서는 이유 모를 정서적 어려움을 떠안는다. 그 남편은 내면의 불편들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아내에게 신체적·정서적 폭력을 되돌려줄 가능성이 높다. 어머니의 불행한 내상이 마지막으로 흘러드는 곳이 어린 아들의 내면이다.

 소년 카뮈가 성폭행 당한 어머니 곁에 누워 밤을 보낼 때 그의 내면은 곧 어머니의 내면과 같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픈 상태로 누워 있었을 뿐이지만 죽음 같은 감정은 물처럼 흘러 아들 내면을 적셨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카뮈가 ‘부조리’라고 명명하는 세계, 작품에 묘사하는 비현실적 세계의 뿌리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소년 카뮈의 내면에서 ‘완전히 해체되어 버린 세계’의 연장일 뿐이다. 그의 소설 속 인물은 ‘햇빛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갇혀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며’ 죽고 싶어 한다. 카뮈가 죽음 충동을 행동으로 표출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글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내면에 선천적 불구와도 같은 무관심이 있다”는 고백을 들으면 그가 심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내면 감정을 방어했는지 짐작하게 된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