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가는 보고서만 작성 말고 큰 전략 수립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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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재외공관장 회의 이틀째인 31일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 203호 회의실은 볼펜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릴 정도로 차분했다. 그러나 하루 전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작심 발언’이 외교부 안팎에 던진 파장은 컸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여야 할 것 없이 비판적이었다.

 “(한국이) 미·중 양측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상황은 결코 골칫거리나 딜레마가 아닌 축복”이라고 한 윤 장관의 발언에 대해 정문헌(새누리당) 의원은 “(미·중) 양측에서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쪽은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된다”며 “외교에 결코 도움이 안 되는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홍익표(새정치민주연합) 의원도 “축복인지 딜레마인지는 장관이 아닌 제3자가 판단할 사항”이라며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으로 스텝이 꼬인 게 사실인데 외교부 장관으로서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윤 장관이 “고뇌가 없는 무책임한 비판에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발언한 것도 꼬집었다. 익명을 요청한 새누리당 중진 의원은 “발언의 전반적인 수위와 내용을 볼 때 외교부 장관으로서 바람직한 발언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외통위 소속 김세연(새누리당) 의원은 “윤 장관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듣기에 따라선 부적절하다”며 “호락호락하지 않은 국제 현실 속에서 굳이 모든 이가 동의하기 힘든 발언을 했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도 비판 기류가 강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외교 전문가는 “(장관 재임) 2년간 쌓인 문제가 3년차 들어 하나씩 터져나오고 있는 것”이라며 “지금부터라도 청와대 보고서 작성에만 치중하지 말고 외교의 큰 전략 수립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발언뿐 아니라 윤 장관의 지난 발언들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 성사와 관련, 윤 장관이 지난달 29일 KBS ‘일요진단’에 출연해 “(아베 총리의 미 의회) 연설이 성사되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 외교의 목표가 아니다”고 한 발언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 외교 전문가는 “외교 실패를 가리기 위한 자기 변명으로 비칠 수 있는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외교부 내에선 ‘외교’뿐 아니라 ‘내교(內交)’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 외교부 간부는 “장관이 국익을 위해 동분서주해 왔는데도 국내에서 비판이 많은 것은 우군이 적기 때문인 것 같다”며 “국내 여론 주도층을 상대로 내교 차원의 공공외교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외교부 내에서는 “윤 장관이 다소 흥분한 듯 센 발언을 해서 솔직히 놀랐다”(영어권 대사)는 반응과 “ 외교부 공관장 내부 훈시라는 점에서 격려성으로 보는 게 맞다”(유럽권 대사)는 반응이 엇갈렸다.

전수진·허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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