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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오디세이] 개인의 머리에서 나왔나, 정부가 법률로 만들었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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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호 20면

제1차 세계대전 중 시베리아에 진출한 일본군의 승리를 선전하는 포스터. 일본군의 대륙진출에 맞추어 군자금을 취급하는 조선은행 조직도 확대되었다. 1911년 출범 당시 중국 내 조선은행 조직은 1개뿐이었으나 1919년에는 22개로 늘어나 조선, 일본, 러시아의 지점들을 모두 합한 것보다 많았다.

중국이 제안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을 두고 한국·미국·중국 간의 신경전이 한창이다. 한국은 AIIB에 가입하기로 했다. 미국은 이 기구의 창설을 떨떠름하게 바라보고 있다. 금융 문제에 있어 미국이 냉가슴을 앓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중국이 금융 분야에서 의제를 선점하는 모습은 100년 전과 정반대다.

⑩ 화폐의 본질

19세기 말 중국은 암울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러시아 표도르 대제의 개혁을 모범 삼아 황제(광서제)가 추진하려던 변법자강운동(1898년)은 서태후의 쿠데타로 실패했다. 황제는 감금되고, 개혁은 중단되었다. 그 뒤 열혈청년들이 외세를 추방하고 청나라를 살리겠다고 궐기했으나 그것도 실패했다(1900년 의화단사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일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독일의 군사개입으로 외세의 입김은 더 커졌다. 그런 일이 있은 뒤 화폐개혁을 시도하는 것은 무의미했다(그 무렵 조선의 고종도 똑같은 시도를 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은을 돈으로 사용했으며 멕시코의 페소화(은화)도 자국 화폐처럼 유통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금본위제도가 정착해 있었고, 1900년에는 미국도 금본위제도에 동참했다. 그래서 청나라 조정은 1903년 서구열강들에게 화폐제도를 자문했다. 미국의 존 헤이 국무장관이 4명의 교수를 파견하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러시아 등도 전문가를 보탰다. 하지만 결심이 너무 늦었다. 미·영·프·독 신디케이트로부터 1000만 파운드를 차입하여 금본위제도를 시행하려던 순간 신해혁명(1911년)이 일어났다. 그리고 청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중국이 다시 화폐제도 개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한참 뒤였다. 쑹쯔웬(宋子文)은 송나라 때부터 이어져 오는 상인가문 출신으로서 당대 최고의 부자였다. 그는 쑨원(孫文)과 장제스(蔣介石)의 손위 처남이기도 했다. 그런 세도가가 중화민국 재무장관까지 맡아 미국에 화폐제도를 자문했다. 미국과 가까워지려는 속셈이었다.

1930년대 조선은행의 영업망. 일본의 국책기업인 만철주식회사의 철도망과 깊은 관계가 있다. 조선은행은 일본 군부와 관료(대장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이익을 극대화하거나 구제자금을 지원 받았다. 그것이 조선은행이 살아가는 법이었다.

때를 놓친 중국의 화폐개혁
이렇게 해서 1928년 말 중국으로 초청된 사람이 프린스턴대학교의 케머러(Edwin Kemmerer) 교수였다. 그는 미국 정부의 기획으로 만들어진, 당대 최고의 국제스타였다. 케머러는 쿠바를 비롯한 중남미 신생국과 유럽 후진국들의 화폐제도 개혁을 도운 경험이 있어 ‘돈박사(Money Doctor)’라고 불렸다.

미국 정부가 케머러를 파견하여 추구한 것은 금본위제도의 확산이었다. 20세기 초까지 미국은 뒤늦게 금본위제도에 합류한, 국제통화제도의 주변국 또는 지진아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세계에서 가장 금을 많이 보유하게 되면서 금본위제도의 중심국이 되었다.

케머러는 1929년 중국을 떠나면서 쑨원의 ‘쑨(孫)’을 화폐단위로 하는 금본위제도 도입을 촉구했다. 하지만 수백 년간 은화를 쓰던 중국이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힘든 제안이었다. 결국 1911년 신해혁명에서 1935년 국민당 정부의 관리통화제도 선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군벌들의 군웅할거 속에서 지역마다 각기 다른 화폐가 유통되는, 화폐제도의 자유방임상태가 계속되었다. 비스마르크가 통일제국(1871년)을 세우기 전의 독일이나 남북전쟁(1861년) 이전의 미국과 똑같았다.

중국에서도 만주 지역은 변방이라서 화폐질서가 특히 어지러웠다. 북만주에서는 길림관첩(吉林官帖)과 흑룡강관첩(黑龍江官帖) 등 군벌들이 발행한 불태환 지폐와 러시아 루블 지폐가 유통되고, 남만주에서는 상업은행들이 발행하는 은행권 즉 봉천표(奉天票)가 유통되었다. 주화는 더욱 어지러웠다. 한마디로 말해서 금·은·동 세 가지 종류가 전부 유통되는 가운데 지역에 따라 금속의 함량이 달랐다.

당시 요동반도 잉커우(營口) 지역 주화는 과로은(過爐銀), 백두산 북쪽 안둥(安東) 지역 주화는 진평은(鎭平銀)이라고 불렀다. 같은 안둥 지역에서도 무역거래에는 진평은을 사용하고, 서민들의 거래에서는 물건 종류에 따라 대양전(大洋錢)과 소양전(小洋錢)을 구분해서 사용했다. 물건에 따라 주고받는 돈의 종류가 달랐던 것은 물건에 따라 1근(斤)의 무게가 다른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러니 불편했다. 만주 지역에 가장 먼저 진출한 외국 금융기관은 요코하마정금은행(橫浜正金銀行)이었다. 이 은행은 1899년 무역항 잉커우에 지점을 설치한 뒤 1902년부터 은행권을 발행하면서 만주의 화폐제도에 침투했다(일본 제일은행이 부산에서 은행권을 발행하여 조선의 화폐제도를 잠식한 것과 같은 때다).

이후 조선은행이 설립되고, 조선은행도 안둥, 다롄, 펑톈(奉天), 창춘(長春) 등에 영업망을 설치했다. 그러면서 조선은행권도 유통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입장에서 어떤 은행권을 보급시켜야 하는가?

만주가 완전한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위해서는 일본이 채택한 금본위제도가 적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조선은행을 만주의 중앙은행으로 결정했다(『만주에서의 특수은행 기능의 통일에 관한 건』). 조선은행권은 법률적으로 일본은행권과 1대1 교환이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지 중국인들은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

은본위제도에 익숙한 중국인들은 요코하마정금은행권을 선호했다. 요코하마정금은행권은 형식면에서 은화와의 교환을 약속한 어음(일람불어음)이었다. 금권(金券)이라고 불리던 조선은행권보다는 은권(銀券)이라고 불리던 요코하마정금은행권이 중국인들의 정서에 맞았다. 그래서 두 은행권이 공존했다.

요코하마정금은행권과 조선은행권의 경쟁은 만주의 현실론과 이상론의 싸움이었다. 이 경쟁의 첫 번째 승자는 조선은행이었다. 다롄에 주재하던 조선은행의 오타(大田三郞) 이사는 입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만주 지역을 다스리는 야마카타(山縣伊三郞) 관동성 장관을 찾아가서 “러일전쟁을 통해 일본인의 피로 획득한 만주를 일본의 경제권과 동일하게 하는 것은 정부의 의무”라고 설득했다.

194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앞) 집무실을 방문한 쑹쯔웬(宋子文, 오른쪽). 당시에는 중국 외무장관을 맡고 있었다. 하버드대학교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수학한 쑹쯔웬은 대표적인 친미파 인물이었다.

조선은행, 민심수습한다며 부동산대출 확대
오타에게 설득당한 관동성은 다롄거래소(大連去來所)에서 거래되는 각종 곡물의 가격을 1921년 10월부터 금건(金建) 즉, 금권으로만 표시하도록 했다. 이는 요코하마정금은행권의 유통을 금지한다는 선언이었다. 이에 중국 상인들이 일제히 반발했다. 그 바람에 거래소 기능이 한동안 마비되었고, 다롄 지역의 상인들은 일본 의회에 계속 탄원서를 제출했다. 결국 ‘금건화 계획’은 백지화(1923년 9월)되고 요코하마정금은행과 조선은행의 경쟁은 2년 만에 원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선은행은 많은 것을 잃었다. 당시 조선은행은 현지 민심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부동산담보대출을 대폭 확대했다. 금건화 찬성 여론을 조성하려던 의도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계기로 동북아 지역의 과열되었던 경기가 급락(반동불황)하면서 부동산 경기도 침체했다. 금건화가 시행되기 전 2년 동안 6배나 급등했던 다롄 지역의 부동산 가격은 이후 2년 동안 반토막이 났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부동산담보대출을 늘렸던 조선은행의 손실은 실로 엄청났다. 여론조작 비용치고는 너무 컸다. 이것이 1920년대 초 만주 지역의 화폐를 조선은행권으로 통일하려던 ‘금건화 계획’의 전말이다.

중국은 금본위제도의 무덤이다. 쑹홍빙(宋鴻兵)은 『화폐전쟁』에서 금본위제도를 옹호했지만, 정작 중국인들은 그것을 계속 외면해 왔다. 쑹홍빙과 케머러, 그리고 오타는 4대 문명 발상지 중에서 금을 한 번도 돈으로 쓰지 않았던 지역은 중국뿐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이들에 비해서 1950년 한국은행법을 만들 때 한국이 섣부르게 금본위제도를 채택하지 말도록 권고한 Fed(미 연준)의 블룸필드 박사는 현명했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화폐를 “거래의 편의를 위해 개인들이 고안해 낸 발명품”이라고 가르친다. 오스트리아 학파의 카를 멩거가 사회진화론적 관점에서 쓴 『화폐의 기원(1892년)』에 소개된 내용이다. 그러나 게오르그 크나프는 『화폐국정설(1905년)』에서 “화폐는 법의 산물”이라고 단언한다. 화폐는, 강제력을 가진 정부가 법률로써 “이것이 돈이다”고 선언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로 시작하는 창조론에 가깝다.

불태환 화폐제도에서는 정부의 힘을 강조한 크나프의 주장이 진실에 가깝다. 중국이 설립하려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도 결국 시장이 아닌, 정부 간의 기싸움이다. 그러나 20세기 초 만주의 사례는 정부보다 시장의 힘을 강조한 멩거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러시아와 중국을 무찌른 일본의 군부도 만주 상인들의 금고에 ‘금권’을 침투시킬 수는 없었다.

한편, 금건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조선은행은 엄청난 위기를 맞았다. 감독당국이 바뀌고 임원진이 경질된 것은 물론, 일본 본토에서는 조선은행 폐지론까지 나왔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과 미국 펜실베니아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올해로 30년째 한국은행에서 근무 중인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 『숫자없는 경제학』 『금융 오디세이』 등 금융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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