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 칼럼] 노후에 더욱 중요해지는 친구네트워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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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객원기자

얼마 전 한 달에 한번 점심을 먹는 친구들 모임에 나갔었다. 평소 잘 빠지지 않던 얼굴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지난 해 연말 A그룹 임원인사 때 옷을 벗은 친구였다. 높은 연봉에 번듯한 지위까지 겉으론 남 부러울 게 없어 보여 퇴직해도 아무 걱정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받은 월급은 아이들 교육비와 노부모 병치레에 써서 저축 한번 제대로 못했다. 더구나 아직 미혼인 누이의 생활비까지 대줘야 했다. 그는 내 집도 없었다.

퇴직한 친구들을 보면 자주 나가던 모임을 찾는 횟수를 줄이는 경우가 많다. 한때 잘 나가던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여전히 현역인 남들과 비교해 초라해진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이 가장 큰 이유인 듯하다. 강남에 아파트 한채 샀다, 금융자산을 굴려 짭짤한 재미를 봤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동안 뭐했지’라며 자조에 빠진다. 아들 결혼 때 전셋집을 마련해줬다는 자랑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 싶은 심정이다. 마누라한테 사정해 겨우 밥값을 얻어 나왔는데, 별 생각 없이 떠드는 친구들이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보면 결국 모임 참석이 뜸해지고, 같은 처지의 퇴직자들끼리 모여 동병상련을 나누게 된다. 퇴직후 멀어지는 친구 사이를 복원하는 방법은 없을까.

정으로 통하는 사회

우리나라는 정으로 통하는 사회다. 친구와의 관계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돈이 없어도 친구가 많으면 마음 만큼은 부자다. 친구 중심의 인적 네트워크는 은퇴 전이나 후 모두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다. 친구는 자아가치를 재확인하거나 자아검증의 수단에도 기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걱정이 있거나 고독할 때 가족보다 친구를 찾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은퇴 후엔 친구 관계가 은퇴 전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사회활동 범위가 줄어들기 때문에 친구의 중요성이 더 커지는 것이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는 최근 2011년부터 2014년 상반기까지 소셜미디어에 나타난 노후와 관련된 담론 중 최근 언급량이 두드러지게 증가한 키워드 5개를 선정해 집중적으로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분석에 따르면 이 기간동안 언급량이 증가한 키워드는 홀로·친구·일 ·여행 ·텃밭 5개 키워드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친구가 자녀보다 더 많이 언급되기 시작했다는 부분이다. 노후와 친구를 함께 언급한 건수는 매년 13% 이상 증가해 월평균 1081건(2011년)에서 1550건(2014년)으로 올라섰다. 반면 노후 관련 연관어 순위에서 자녀는 7계단 하락해 대조를 보였다. 특히 노후에 여행을 함께 계획하는 대상에서도 친구가 배우자보다 더 많이 등장했다. 노후에 중요한 순위에서 친구는 4년간 꾸준히 2위를 유지했지만 부부, 남편, 아내 키워드는 11~14위 사이에 머물렀다.

친구는 노후의 으뜸 자산

은퇴생활에서 친구라는 사회적 관계는 재무적 안정을 찾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하다. 하지만 노후에 친구사귀기가 쉽지 않고 있는 친구마저도 소원해지는 게 현실이다. 나이를 먹으면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에 대해 비판적인 성향을 띠어 상처를 주기 쉽고 받기도 쉬워져서다. 젊을 때엔 쉽게 화해했을 일도 여간 해서 타협점을 찾기 어려워진다. 사소한 것 가지고 언쟁을 벌이다 육두문자가 튀어나오고 드잡이까지 벌인다. 종국엔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대화를 나눈다 해도 기껏해야 상대방의 뒷담화나 옛날 이야기가 주류여서 하품만 나온다. 은퇴기엔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은퇴는 하나의 ‘현상’이다. 이 세상 모든 월급쟁이는 시기가 문제일 뿐 언젠가는 직장을 떠난다. 우리나라에선 대개 55세 넘으면 싫건 좋건 계급장을 떼고 퇴직행렬에 들어선다. 집을 나오면 술집, 밥집이나 산에서 친구들과 마주치는 기회가 많아진다. 그땐 너나 나 구분 없이 똑같은 백수신세다. 먼저 직장을 나왔다고 주눅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행복은 관계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쓸쓸하고 외로운 은퇴생활일수록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행복이 커진다. 현역에 있다면 퇴직 친구를 나 몰라라 하지 말고 먼저 다가가 따뜻한 손을 내밀자. 그 기나긴 은퇴생활을 오아시스 없는 사막처럼 무미건조하고 재미없게 보내지 않으려면 말이다. 친구는 노후의 으뜸 자산이다.

서명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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