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자본주의는 격차 벌리는 제도…정의로운 소비 통해 부의 선순환 이뤄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그새 문을 닫았다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지난해 여름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며 마르크스주의와 생태주의에 기반한 착한 생산과 소비를 강조해 일약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책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빵집 주인이자 책의 저자인 와타나베 이타루(44ㆍ渡?格)에게 e-메일을 보냈더니 “빵집 문을 닫고 이사 중”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요즘 세상에 마르크스 운운하더니 망하고 말았군’이라는 생각이 들 찰나, 와타나베는 설득력 있는 답변을 이어갔다. “우리 철학에 맞게 지역의 자연재배원료로 소맥분을 만들려면 높이가 6m나 되는 ‘롤 제분기’가 필요했어요. 그런데 오카야마(岡山)현 가쓰야마(勝山)의 빵집 건물은 천정이 낮아 롤 제분기를 축소해서 설치했죠. 그랬더니 그만 고장이 났어요.”

와타나베는 천정이 높고, 지역농가에서 거둬들인 밀을 일괄 보관할 대형 냉장고를 설치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이웃 돗토리(鳥取)현 지즈(智頭) 마을에 있는 옛 보육원 건물을 알게 됐다. 요즘 와타나베와 부인 마리코(41·麻里子)는 수년 전 인구 감소로 문을 닫은 이 보육원을 직접 빵집으로 개조하고 있다. 원래 5월쯤 다시 문을 열 계획인데 손수 인테리어 공사 등을 하다보니 좀 늦어질 전망이다.

사실 장소 이전보다 더 큰 뉴스는 ‘시골 빵집’에서 ‘시골 맥주집’으로 경영의 중심을 옮긴다는 점이다. 와타나베는 “가게를 처음 열 때부터 우리의 목표는 ‘지역의 천연균, 천연수, 자연재배원료를 사용해 우리만 만들 수 있는 먹거리를 만들자는 것’이었어요. 빵이든 맥주든 같은 효모를 사용하니 다를 건 없죠. 다만 빵은 만들다가 제가 요통에 걸릴 정도로 힘든 반면, 맥주는 공정이 기계화돼서 뽑아내기가 훨씬 편합니다.” 라고 말했다.

연면적이 330㎡는 족히 될듯한 보육원 건물을 활용해 빵과 피자를 내놓는 카페, 맥주 바, 숙박시설까지 운영하겠다는 구상이다. 가게의 이름은 변함없이 ‘다루마리(이타루의 다루와 마리코의 마리를 합친 것)’다.
인터뷰 약속을 한 뒤 오사카(大阪)에서 급행 열차를 탔다. 2시간 15분이 걸려 도착한 지즈 마을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오카야마현에 있던 빵집은 주변이 고택(古宅) 보존지구로 지정돼 시골이어도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다. 여긴 그냥 첩첩산중이었다. 지즈역에서 내렸더니 와타나베 부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부부의 경자동차를 타고 15분쯤 더 산 속으로 들어가자 공사중인 폐(廢)보육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데서 장사가 되겠습니까.

(마리코) “수요는 충분히 있어요. 예전 빵집보다 오사카ㆍ교토(京都) 같은 간사이(關西) 지역 대도시에서 오는 교통편이 더 편리해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깨끗한 환경 속에서 천연균으로 만든 빵과 맥주를 즐기며 리프레시하기를 원하거든요. 책을 읽고 한국에서 찾아오는 분들도 많아요. 인터넷도 있잖아요.”

한국 사람들이 꽤 오는지 부부의 5살 짜리 아들 히카루는 기자를 보고 “안뇨하세요(안녕하세요)”라며 큰 소리로 인사할 정도였다. 아빠 머리 위에 올라타려는 히카루를 곁에 둔 채 이들의 경영 철학, 삶의 철학에 대한 질문을 시작했다.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경영 철학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지만 일부는 머리를 갸우뚱합니다. 이윤을 좇지 않는 사업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요. 특별히 욕심이 없는 소시민들도 노후 대비, 자녀교육 등에 대한 걱정 때문에 돈을 쌓아두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타루) “자본주의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세분화’예요. 예전엔 가구당 TV가 한 대였는데 지금은 두 대, 세 대씩 있죠. 그만큼 가족, 지역사회라는 개념이 무너지고 개인주의가 만연하면서 사회안전망이 없는 사회가 된 겁니다. 이걸 자본주의 경제에선 ‘소비가 늘면서 성장이 촉진된다’고 표현하죠. 그래서 우리는 땅에서 곡식이 나면 그걸 화학비료나 첨가물 없이 지어먹고, 그 먹거리를 팔 땐 품질과 노력에 상응하는 높은 값을 받아 모두가 풍요로운 ‘순환형 사회’를 만들자는 도전을 하고 있는 겁니다. 먼 옛날처럼 말이죠. 우리도 (노후 등에 대한) 불안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먹고 사는 데엔 문제없다는 자신감이더 강해졌습니다.”

(마리코)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금욕적인 삶을 살자는 게 아니예요. 우리도 당연히 기계가 고장날 때라든가 아이들이 아플 때를 대비해서 열심히 저축하고 있죠. 하지만 보석이나 비싼 자동차를 엄청나게 가져야 체면이 산다는 생각은 없다는 얘기예요. 도시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깨끗한 자연의 혜택을 받으며 공동체 속에서 사는 게 훨씬 행복하니까요.”

-사업을 빵, 맥주, 피자에 숙박시설까지 확대하면 돈은 더 벌겠습니다.

(이타루) “모르죠. 저는 오히려 우리가 여기로 이사오게 된 계기인 롤 제분기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 저 제분기로 빵의 소맥분도 빻고, 맥주의 맥아도 빻습니다. 한 마디로 제분기가 사업의 심장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지역과 인근 지역의 사람들이 ‘아, 저 집은 지역 고유의 빵도 만들고 맥주도 만드는구나’ 하는 인식이 퍼지면 우리 상품의 가치도 높아지게 되는 것이고요. 지금까지는 빵 하나에만 가치를 뒀다면 앞으로는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순환형 지역사회 만들기에 더 중점을 두겠다는 겁니다. 나무를 베는 사람, 농사를 짓는 사람에 저까지 포함해 천년 후에도 유기적으로 함께 사는 게 지속가능한 마을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가치를 높이겠다는 겁니다.”

-가치를 높인다고 했는데 일반적인 소비자는 어떻게 해서든 싼 걸 사려고 하지 비싸더라도 값어치를 다 지불하고 사겠다는 생각은 별로 안 하는데요. 와타나베 부부가 생각하는 정의로운 소비란 무엇입니까.

(마리코) “도시 생활을 계속하면 논밭을 본 적도 없고 공장에서 어떻게 물건이 만들어져 나오는지도 모르니까 무조건 싼 걸 찾는 경향은 있죠. 하지만 저도 주부지만, 아이들이 먹을 것을 살 때는 비싸더라도 양질의 상품을 찾게 돼요. 그게 모든 방면에서 생활화돼야 하는 것이죠.”

(이타루)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격차를 벌리는 시스템입니다. 그런 문제를 조정하라고 정치가 있는 것이지만 결국 정치인들은 돈 많은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고 말죠. 저는 ‘정치가 그대로 뭔가 해 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 자체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같은 서민들이 서로가 만든 물건에 높은 부가가치를 매겨 거래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부를 서민 사이에서 빨리 돌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렇게 부의 선순환이 일어나면 부가 부자들에게 쏠리는 것을 막고, 적어도 분배를 원활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일이군요.

(이타루) “투표를 통해 세상을 바꾼다는 주장과 비슷한 거예요. 일본에선 요즘 그런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올바른 소비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가 원자력발전소를 추진하면 그 회사 제품을 사지 않는 등의 활동을 하죠. 싼 것만 찾지 않고 정당한 가치를 지불하자는 운동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도쿄나 서울에 지점을 내도 장사가 될 것 같다는 말에 와타나베 부부는 정색했다. 지역의 순환경제를 구축하겠다는 자신들의 이념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족이 중요한데 일주일에 몇 번을 도쿄에 따로 가서 가게를 살펴보는 일은 할 수 없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1주일에 나흘 일하고 사흘 쉰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가게 운영이 됩니까.

(마리코) “종업원들은 쉬었지만 우린 거래처 사람을 만난다든지 일했죠, 뭐.”
(이타루) “앞으로 맥주집이 중심이 되면 5일 일하고 화·수요일 이틀만 쉬려고 합니다. 맥주는 그렇게 힘들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겨울에 한 달 휴가를 가고요.”

좋은 근로조건에도 불구하고 가쓰야마에서 일하던 종업원 4명과 아르바이트생 2명은 가게 이전을 통보하자 모두 그만뒀다. 마리코는 “가게 이전 결정도 좀 극적으로 이뤄졌고, 우리 부부야 맥주를 할 생각을 예전부터 했지만 그들은 빵집으로선 끝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지즈의 새 가게에선 일단 맥주 만들기를 담당할 종업원 1명을 새로 뽑은 상태다. 공사 일도 함께 하고 있다. 나머지 종업원은 마음이 맞는 사람으로 차차 뽑을 생각이다.

-가족 모두 행복해 보입니다. 혹시 행복하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까.

(이타루) “시골에 와서 생활하는 게 고생이 많죠. 고생이 없으면 행복도 느낄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그냥 경제적인 성공만을 좇았다면 더 편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마리코) “저도요. 예전 빵집도 닫으려고 닫았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닫은 측면도 있고. 그 곳에서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저의 한계가 보여서 슬프기도 했고. 지금은 특히 새 가게를 준비하는 기간이라서 손님들과 얘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없잖아요. 완전히 여기로 이사한 것도 아니고 예전 집을 오가며 좀 안정되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는 부분이 힘들긴 하네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해요.”

와타나베 부부는 말했다.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간혹 비난과 야유가 쏟아져도 견뎌낼 수 있어요. 썩을 것은 썩고 발효할 것은 발효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게 인생이니까요.”

지즈(智頭)=박성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