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우리들 속의 '他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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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해마다 5월 말이 되면 역사학 분야에 종사하는 국내의 연구자들과 학도들이 모여 공동 주제를 정해 놓고 토론을 벌이는데 이 같은 '전국 역사학 대회'가 올해로 46회를 맞이한다.

공동 주제를 선정할 때에는 지나간 역사를 이해하는 데 긴요하다고 생각되는 학술적인 문제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되지만, 그때 그때 시의에 적절한 문제들이 거론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지난해 주제였던 '문명 간의 상호 인식'은 9.11 사태 이후 상이한 문명의 대립과 갈등이 사회적 화두가 됐기 때문에 선정된 것이다. 올해의 주제인 '역사 속의 타자(others) 읽기'도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해 있는 문제들과 결코 무관한 것이라 할 수 없다.

*** 차별보다 더 심각한 대화 단절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우리는 수많은 '타자'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자기가 속한 국가와 영역 너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야만'이라고 멍에를 씌우고 스스로를 '문명'이라 자부했던 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역사 현상이었다.

또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은 그 존재의 가치를 올바로 인정받지 못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타자'였고, 다수 민족의 틈바구니에 끼여 억압받고 눈치보며 심지어 절멸의 위험까지 느끼며 살아야 했던 소수민족도 주류 사회에 속하지 못하는 '남'이었다.

지배권력에 의해 천민으로 낙인찍혀 자신뿐 아니라 그 자손들까지 대대로 온갖 수모를 감내해야 했던 노비나 백정과 같은 계층도 마찬가지였다. 역사는 이처럼 민족.문화.성별.계층을 기준으로 삼아 수많은 '언터처블'을 끊임없이 재생산해 왔던 것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불평등과 차별을 상당히 극복했다고 자부한다.

남녀 간에 완전한 평등이 실현됐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이제는 역차별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니 분명히 달라진 것은 사실이고, 사회적 권익을 충분히 보장받지 못했던 노동자들도 파업과 같은 방식을 통해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같은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기조차 어려운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들 안에 '타자'로 남아 있다. 자신의 결집된 힘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압박을 가할 아무런 수단도 갖지 못한 장애인들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의 처지는 아직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 같은 소수의 '타자'들에 대한 차별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자신과 견해나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과 집단을 너무 쉽게 '타자'로 낙인찍어 버리는 현상이다.

'타자'라는 것은 '나'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대상일 뿐, 양자 간의 관계에서 대화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봉쇄돼 있다. 따라서 서로 만나 대화하기도 전에 이미 결론은 나있는 셈이고, 조정과 타협을 통해 합의에 이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최근 물류대란을 일으켰던 화물연대 파업이 마무리되는 과정을 보면서, 또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의 도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첨예한 대립을 바라보면서 과연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굴복'이 아니고는 해결의 방법이 없는가 생각하게 된다.

*** 일방적 굴복보다 조정.타협을

현대가 다원적 가치가 공존하는 시대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정치적 신념이나 문화적 가치를 달리하는 수많은 '타자'의 존재를 일상적인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양성의 공존이 반드시 축복만은 아니다. 그만큼 통제가 어려워졌고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것도 힘들어졌다.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는 '나'와 '남'의 공존을 가능케 하는 지혜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아마 일찍이 신학자 마틴 부버가 설파했듯이 '타자'를 '남'이 아닌 '너'로 인식함으로써 '나'와 '그'의 관계를 '나'와 '너'의 관계로 전환하는 지혜일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장차 이 사회가 총체적인 파국을 맞이하게 됐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위험한 항해를 했던 '너와 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金浩東(서울대 교수/ 동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