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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의 매력, 대체 뭘까요 그림자 다섯 개도 못 본 것 같은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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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시네마 썰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본 여기자들의 수다

‘엄마들의 포르노’라 불리며 전 세계를 강타한 E L 제임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원제 Fifty Shades of Grey, 샘 테일러 존슨 감독)가 지난달 25일 개봉했다.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에 파격적 성애 묘사를 버무린 작품의 묘미가 스크린에서도 제대로 구현됐을까? 이 영화를 본 세 명의 여기자가 모여 솔직한 감상을 나눴다.

S씨 30대 초반. 원작이 파격적이라는 소문이 자자해 가학·피학적 성행위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영화를 보러 갔다가 헛웃음만 터트리고 나왔다.

N씨 20대 후반. 예고편을 보며 아슬아슬하고 섹시한 로맨스를 기대했다. 이 정도면 여성 관객의 로맨스 판타지를 제법 채워줬다고 생각한다.

A씨 20대 후반. 부실한 스토리는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허술한 서사와 여성을 수동적으로만 그린 이 영화의 태도에 크게 실망했다.

S씨 요즘 뜨거운 감자인 이 영화, 어떻게 보셨나요?

N씨 할리퀸 로맨스(1980년대 출간된 로맨스 시리즈물. 통속 연애 소설을 대표하는 용어)와 BDSM(B(Bondage, 결박)·D(Discipline, 훈육)·SM(Sadomasochism, 가학 피학적 성애))이 섞인 원작 분위기를 고려하면, 그럭저럭 볼 만했다에 한 표입니다.

A씨 저는 이게 뭔가 싶을 만큼 실망스러웠어요. 원작 소설의 도입부만 다뤄서 그런지 결말이 너무 맥 없더라고요.

S씨 확실히 시리즈의 1편임을 고려해도 좀 약하다는 생각은 들어요. 대단한 짜임새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BDSM에 대한 호기심이라도 해결해줄 줄 알았는데 말이죠.

N씨 신데렐라 판타지·성적 판타지·평강공주 판타지까지. 영화에서는 그게 각각 80·10·10퍼센트 정도의 비중으로 그려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S씨 저는 이도저도 아닌 것 같던데요. 차라리 파격적 성애 묘사로 승부를 띄웠다면 나름의 미덕은 가질 수 있었을 거라고 봐요. 그런데 그레이(제이미 도넌)가 계속 ‘날 가까이 하지 마’라며 있는 대로 겁 주는 것에 비해서는 별 것 없잖아요. ‘에게? 이게 다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웃음). 미국에서는 영화를 보다가 졸도한 관객도 있다던데 어떻게 된 거죠.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에서 이런 콘텐트를 선택한 시도는 용감하지만 결과물이 안타까워요.

N씨 수위 문제는 상업영화를 표방한 이상 어쩔 수 없었을 것 같아요. 할리퀸 로맨스는 보고 싶은데 BDSM은 꺼려지는 여성 관객까지 포섭해야 했을 테니까요.

S씨 그 둘을 모두 만족시키겠다는 모호한 자신감이 오히려 결정적 패착이라고 봐요. 책을 읽으면 머릿속으로 무한대로 상상할 수 있는데, 그걸 상상력보다 빈곤하거나 혹은 너무 점잖게 보여주니까 오히려 김 빠진다는 거죠.

A씨 원작 자체가 여성을 위한 ‘성 자기 계발서’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BDSM도 ‘이런 성행위도 있다’는 소재 차원으로만 이용한 것 같아요.

S씨 이 영화가 어딜 봐서 ‘성 자기 계발서’다운 측면이 있나요? 차라리 법적 효력을 갖는 계약서의 교훈을 일깨워 준다면 모를까.

N씨 하지만 전 장점도 분명하다고 봐요. 성애 장면이 생각보다 감각적이었고요. 남성 감독이 묘사하는 섹스신보다는 확실히 부드럽고요. 그레이와 아나스타샤(다코타 존슨)의 첫 섹스 장면에서 카메라는 둘의 몸을 훑다가 천장에 반사된 그들의 모습을 비추죠. 이런 식의 간접적 묘사가 영화의 분위기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S씨 글쎄요. 전 방금 말씀하신 장면을 가장 잘 활용한 영화 중 하나가 ‘원초적 본능’(1992, 폴 버호벤 감독)이라고 생각해요. 그 영화에서는 같은 카메라 구도로 말초신경까지 자극하는 듯한 감흥을 전달했다면, 이 영화는 그저 예쁘게 보이는 데 급급한 인상이에요.

A씨 나름의 분위기가 있다는 N씨의 말에 저도 어느 정도는 동의해요. 그레이가 헬기에서 아나스타샤에게 의자 벨트를 채워주는 장면이 대표적이죠. 아찔해 보이긴 하잖아요. 촉각에 예민한 여성의 심리를 섹시하게 포착한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N씨 맞아요. 일단 이번 편에서는 ‘우아한 포르노’라는 점을 관객에게 인지시키는 데 중점을 둔 것 같아요. 이를테면 엘리베이터가 닫히는 순간 그레이와 아나스타샤가 눈빛을 주고받거나, 그레이가 피아노 치는 모습 등은 인상적으로 기억할 수 있게 됐어요. 웃기게 패러디하고 싶을 만큼 어쨌든 강렬한 인상을 줬다는 거잖아요.

A씨 그래도 대사와 인물의 감정을 묘사하는 장면들은 적잖이 생뚱맞아요. 아나스타샤가 그레이의 어떤 면에 빠졌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그레이를 인터뷰 하러 가서 대뜸 ‘심장이 따뜻할 것 같다’고 말하는 걸로 눙치는 식이죠.

S씨 그러니까요. 시리즈의 서론이라는 본분을 제대로 해내려면 인물들의 감정선을 더욱 섬세하게 그렸어야 했어요. 그게 설명되지 않으면 이후 인물들의 모든 행동에 대해서 물음표만 찍게 될 테니까요.

N씨 실제로 많은 관객이 지적하는 문제예요. 하지만 전 그 정도로 이해가 안 되진 않았어요.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가 불꽃이 튀는 건, 연애에서 흔한 일 아닌가요? 그 이후에 둘만 이해할 수 있는 ‘밀당’이 벌어지는 것도 당연하고요.

A씨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건, 아나스타샤가 성 경험이 없다는 점이에요. 그런 여자가 그레이의 어떤 매력에 빠졌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잖아요. 유독 그레이가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장면이 많을 뿐이죠. ‘결국 아나스타샤는 그의 경제력에 마음이 움직인 건가’ 싶을 정도로요.

N씨 대사에 나오잖아요. ‘스마트하고 강렬하다’고요(웃음). 오히려 아나스타샤가 그레이의 요구에 머뭇거리는 모습은 평범한 여성처럼 보이던데요?

S씨 정말요? 저는 아나스타샤의 마음을 도통 모르겠어요. 그건 후반부에 더 심해요. ‘여섯 번 때리기’는 그레이가 했던 가학 행위에 비해 크게 다를 게 없는데, 왜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돌연 이별을 선언하는 거죠? 그 전에 넥타이를 사용하는 건 자기를 묶어달라고 거의 대놓고 말한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런 건 은근히 즐기다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거예요! 즐기다 갑자기 못 하겠다고 울고, 한쪽에서는 계약서에 언제 서명할 거냐고 조르고. 이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까 ‘쟤들 지금 뭐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A씨 맞아요. 아나스타샤가 행위를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정치적 자세가 거북하게 느껴졌어요. 섹스를 가르치고 즐기게 하는 것도 그레이, 계약서를 내밀며 사실상 협박하고 돈을 과시하는 것도 그레이잖아요. 여성은 결국 돈이라는 권력 앞에 언제든 무릎 꿇고 남성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서도 즐길 수 있는 존재라는 건가요?

S씨 그레이가 백만장자가 아니라 잘생긴 거지였대도 아나스타샤가 그에게 빠졌을까요? 하지만 이건 이 영화의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니 무의미한 불만이긴 하네요(웃음).

N씨 대신 그레이는 결함 있는 왕자잖아요. 헬기 태워주는 장면은 솔직히 설레지 않던가요?

S씨 두 번 태우니까 지겹던데요. 그리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예요. 결함(그림자)이 뭐냐고요! 50가지나 있다면서 최소한 1편에서 다섯 개는 보여줬어야죠!

A씨 물론 그레이가 보여주는 것은 낭만적 사랑의 전형이죠. 하지만 이런 식의 판타지는 TV만 틀어도 수두룩하게 나와요. 극장 관객까지 사로잡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아요.

N씨 미술과 음악은 멋지지 않나요. 그런 맛에 극장에서 영화 보는 것 아니겠어요?

S씨 OST가 섹시하긴 하지만, 애써 음악으로 분위기를 만들어보려는 노력으로 보여요.

A씨 혹시 이 모든 게 남자 주인공이 조금만 더 매력적이었다면 다 덮을 수 있는 문제 아닐까요. 특유의 오글거리는 대사를 제대로 살리는 게 관건이었을 것 같은데 제이미 도넌이 그걸 잘 살린 것 같진 않아요.

S씨 그러게요. 사실 전 찰리 헌냄이 하차하고 제이미 도넌이 캐스팅된 걸 격하게 환영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럴 수가! 모델일 땐 짐승 같고 섹시했는데 영화에선 눈빛이 너무 착하더군요. 채찍을 손에 쥐고 ‘이걸 어떻게 해’라며 망설이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N씨 그레이가 아나스타샤의 문자를 기다리는 모습 같은 건 사랑에 빠진 소년 같아서 꽤 귀엽던데요.

S씨 자꾸 이 자리에서 이상형 설파하지 마시고요(웃음). 반면 여배우 다코타 존슨의 매력에 대해서는 별 이견이 없는 것 같아요.

N씨 맞아요. 그의 달뜬 표정이 여성 관객의 판타지를 자극한 또 하나의 요소라고 봅니다. ‘사랑에 빠졌을 때 나도 저렇게 예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할까요.

A씨 입술을 깨물거나 목을 길게 빼면서 머리를 묶는 등 일상적 행동에도 어딘지 모르게 섹시한 느낌이 묻어 나오는 배우더라고요. 그런 점은 다코타 존슨이 잘 살린 것 같아요.

S씨 일단 아직 특정 이미지로 굳어진 배우가 아니어서 그런지, 얼굴과 몸이 완성형은 아니되 예쁜 신인의 느낌이 있어요. 그런 풋풋한 매력이 역할에 잘 어울렸다고 생각해요.

N씨 앗, 항간에는 속편에서 배우가 교체된다는 설이 있던데요. 그래도 보실 건가요?

A씨 글쎄요. 서사에 전혀 공감할 수 없는 1편을 보고 나니 다음 편이 크게 궁금하진 않아요. 게다가 BDSM이라는 소재도 그리 충격적이거나 새롭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에 2편에서까지 ‘그래도 안 볼 순 없다’ 류의 관심을 받긴 어려워 보이네요.

S씨 저는 순전히 갑갑해서 속편이 궁금하긴 합니다. 그래서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지 안 하는지. 일탈적 성적 관계를 넘어 결국 사랑이 승리할 것인지. 그런데 이건 너무 당연하겠죠? 이미 본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죠(웃음).

N씨 결말에 다다르자 아나스타샤가 “안 돼!”라고 소리치고 그레이가 움찔하잖아요. 둘의 관계가 전복된다는 걸 암시하는 장면이라 저는 2편이 궁금해요. 하지만 속편마저도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이야기가 늘어진다면, 그땐 저도 ‘쉴드’를 치기가 좀….

글=이은선·김나현·윤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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