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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간디 같은 큰 지도자 되려면 … 국민 감정을 형제애로 끌어올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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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지난 1월 말 정부는 하루아침에 정책 기조를 바꿨다.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선안 발표 하루 전날 관련 법안을 백지화했다. 건보료 부담이 늘어날 고소득 직장인의 불만을 우려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많았다. 일부 국민의 만족스럽지 못한 ‘감정(emotion)’이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친 셈이다.

 지난달 헌법재판소는 1953년 제정된 간통죄에 대해 62년 만에 위헌 결정을 내렸다. “성(性)에 대한 국민의 법 감정이 변하고 처벌의 실효성도 의심되는 만큼 간통죄 자체가 위헌”이라는 게 헌재 결정문의 요지였다.

 이처럼 정치적·법률적 판단은 ‘국민 감정’을 고려하는 경우가 많다. 법과 제도가 국민 행복을 위한 것인 만큼 그런 결정은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어딘가 불합리한 대목도 있다. 감정은 대개 무분별하거나 일관성이 없다고 인식돼온 탓이다. 정책이나 법은 감정을 배제한, 즉 이성과 논리의 결정체로 이해돼왔다.

 미국 정치철학자 마사 너스바움(68·시카고대 법학·윤리학 석좌교수)은 이런 통념에 반기를 든다. 정치나 법 체계가 인간 감정의 토대 위에 서 있다고 주장해왔다. 나아가 그는 감정이 인지(認知)적 내용을 갖고 있다고 본다. 감정 또한 지극히 논리적이라는 얘기다.

 너스바움의 관심사는 넓다. 그리스 고전철학에서 출발해 문학·정신분석·인지심리학 등으로 영역을 넓혀왔다. 너스바움을 e메일로 만났다. 마침 감정과 법의 관계를 파헤친 『혐오와 수치심』(민음사)이 다음주 국내 출간된다. 그의 답변과 책 내용을 재구성했다.

감정의 역할을 강조하는 미국의 정치철학자 너스바움. “신체로부터 감정을 끄집어내기 위해 열심히 노래하는 진지한 아마추어 가수”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사진 너스바움]

 - 법이나 정치체계가 감정과 연결된다는 주장은 아직 한국에 낯설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얘기 아닌가.

 “미국의 관습법 체계에서 감정은 익숙한 주제다. 도발·공포·자비·공감 같은 감정과 관련된 어휘가 법정에서 자주 쓰인다. 미국의 판사와 배심원은 어떤 식으로든 그런 감정을 해석하고 판결을 내려야 한다. 한데 감정의 본질이나 구조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있어왔지만 법률적인 차원에서 제대로 논의된 적은 별로 없었다. 내 연구는 법과 감정을 하나로 묶는 작업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루소나 밀, 존 롤스 같은 학자들이 정치와 감정의 상관성을 논의했지만 요즘 현대 정치철학에서는 연구가 뜸한 편이다.”

 - 법과 감정은 실제로 어떻게 연결되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주디 노먼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노먼은 여러 해에 걸친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해 결국 남편이 잠든 사이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돌아와 남편을 총으로 쏴버렸다. 남편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고 잠든 사이 쏴버려야 했을 만큼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컸다는 게 노먼의 주장이었다. 이럴 때 법은 노먼이 느낀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타당성 여부를 따진다. 타당하다고 인정돼 정당방위가 적용되면 무죄 판결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감정은 많은 경우 법률적 판단의 고려 대상이다.”

 - 노먼의 두려움은 주관적이다. 그런데도 법적 판단의 객관적 근거로 삼을 수 있나.

 “결론부터 말하면 감정은 분별없는 정서적 격앙이 아니다. 변덕과 거리가 먼 개념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개인이 지닌 가치와 목적에 맞게 조율된 지적 반응이다. 가령 감정의 본질적 기반은 믿음이다. 내가 아닌 ‘현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얘기다. 예컨대 두려움은 조만간 나쁜 일이 닥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 분노는 부당하게 가해진 손상에 대한 믿음이다. 그런 믿음이 사실인지, 또 타당한 것인지를 따져 법적 판단에 활용할 수 있다.”

 - 『혐오와 수치심』도 그런 내용인가.

 “제목대로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두 가지 감정에 주목했다. 공공정책이나 사법 분야에서 두 감정의 역할이 보다 분명하게 보인다. 혐오는 인간 안의 동물적 측면에 대한 비하의 감정이다. 일종의 자기 증오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혐오가 소수 인종이나 성적 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를 동물적이라고 낙인찍는 데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약자를 낙인찍은 후 더 궁지로 몰아넣는 구실로 사용된다.”

에이브러햄 링컨(左), 마하트마 간디(右)

 - 그건 차별의 문제인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이런 혐오의 감정이 법이나 정치에 반영되지 않도록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멀리 볼 필요가 없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생각해보라. 또 수치심은 존재 자체를 부끄러워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개인의 정체성이나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다. 성적 소수자 문제가 대표적이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 정치와 감정의 관계도 궁금하다.

 “6월 한국에서 번역되는 『정치적 감정들』(글항아리)에서 자세히 다뤘다. 사실 모든 사회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 나치즘·파시즘 등 전체주의 사회만 감정적으로 격앙 상태인 것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도 마찬가지다. 한 사회가 구성원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고 경제적 재분배를 통해 사회정의를 이루면서 오랜 세월 지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 동양에서 민심은 천심이라고 했다.

 “내 대답은 그 사회 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감정들, 가령 형제애나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 등의 감정을 공공적으로 함양해야 한다는 거다. 반대로 인종이나 계층에 기반한 혐오, 타인이 축적한 부에 대한 시기 등 위험한 감정은 억제해야 한다. 그 작업을 특정 개인이나 시민사회에만 맡겨둬서는 안 된다.”

 -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리더십이 중요하다. 위대한 정치인은 국민감정을 깊은 차원에서 건드렸다. 한 사회의 공동 과제에 국민감정이 집중될 수 있도록 영감을 불어넣었다. 링컨, 프랭클린 루스벨트, 마틴 루서 킹, 간디 같은 지도자다. 사회가 안정이 되려면 국민의 감정적 지지, 일종의 공통분모를 끌어내야 한다.”

 - 한국만큼 감정이 넘치는 곳도 드물다. 남북분단, 이념 대립 등 역사적 특수성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 팽배한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접시 위에 음식이 잔뜩 쌓여 있다고 해서, 그게 어떤 성분인지 알지도 못한 채 음식이 너무 많다고 투덜대면 되겠는가. 감정 과잉을 걱정부터 할 필요는 없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은 좋은 것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도 그런 열정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처럼 타국의 주권을 침해하면서까지 민주주의를 심으려 한다면 탈이 날 수 있다.”

 - 지난해 세월호 사건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시민의식이 강조되고 있다.

 “시민의 권리와 책임을 어떻게 조화시킬지도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한국의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추상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다. 알려진 대로 세월호 사건은 매우 비극적이다. 선장의 무책임성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학생들의 구조 책임 문제로 논의를 좁혀볼 때 대부분의 나라에선 선장이나 비행기 조종사가 아닐 경우 생명을 무릅쓰고 구조에 나서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 ‘땅콩 회항’ 사건은 어떻게 보나.

 “요즘 분노에 대한 새 책을 쓰고 있다. 한 장(章)을 항공여행에 할애할 생각이다. 땅콩 회항은 특권층의 분노를 돌아보게 한다. 그들이 주변 사람을 쥐어흔들고 겁줄 수 있다는 생각에 얼마나 손쉽게 사로잡힐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역설적이지만 그 여인이 실제로 그렇게 해서 (내 책에) 도움이 될 것 같다.”

[S BOX] ‘포린폴리시’ 선정 세계 100대 지성에 세 번 뽑혀

마사 너스바움의 작업은 학문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 그가 활동하는 미국과 학문 수입국인 한국의 현실정치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숭실대 곽준혁(47·사진) 가치와윤리연구소 소장은 “역사적으로 플라톤의 이성 중심주의가 쇠퇴하면 감성에 주목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대두되는 현상이 반복됐는데 너스바움의 작업은 그런 흐름과 관련 있다”고 설명했다. 도구적 이성에 대한 반성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했으나 기존 질서를 해체했을 뿐 새로운 질서에 대한 대안 제시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1990년대 중반 ‘정치적 감정’ 개념을 앞세운 너스바움의 등장은 감정의 복권을 통해 새로운 돌파구 마련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철학의 최신 동향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학자라는 지적이다. 그가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가 선정하는 세계 100대 지성에 2005·2008·2010년 연속 선정된 것도 그런 위상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곽 소장은 “너스바움의 작업은 21세기 한국 사회에 실천적인 면에서도 의미심장하다”고 평했다. 과거에는 소수 엘리트의 선도 혹은 민주화로 대표되는 당위론적 주의 주장에 사회 발전을 맡겨 두면 됐는데 그런 것들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마당에 사람들의 감정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없으면 일부의 선동이나 대중적 선호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게 된다는 진단이다.

 너스바움은 올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된다. 다음주에 『혐오와 수치심』이 출간되고, 너스바움 스스로 지금까지 저작 중 대표작으로 꼽는 『정치적 감정들』이 6월에 출간되는 등 올해 그의 책 네 권이 번역돼 나온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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