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도 변하는 것…거기서 벗어날 때 창조가 나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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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교수는 “공부를 하든 뭘 하든 나를 찾지 못하면 남이 만든 것을 찬미하다 삶을 마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존재감을 가지라는 것이 노자 사상의 핵심”이라고 했다.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인생의 답이 잘 보이지 않아 여기저기 묻는다. 밑줄을 좍좍 그으며 철학책을 독파하고, 유명 인문학자의 강연을 열심히 찾아 다닌다. 그렇다고 길이 훤히 보이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노자 철학의 권위자인 최진석(56) 서강대 철학과 교수는 말한다. “그만 좀 배워라.”

 EBS 인문학 특강에 출연해 노자의 『도덕경』 강의로 인기를 끈 데다, 최근에는 이 내용을 보완해 엮은 책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위즈덤하우스)을 펴낸 그다. 인기 강연자에 스타 인문학자인 그는 왜 배우지 말라고 말할까. 9일 그를 만났다.

 - 그만 배우라는 건 무슨 이야기인가.

 “배움을 가볍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배우는 목적이 뭔가. 결국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배우는 데만 집중하면 거기에 빠져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거세돼 버린다. 평생 남의 생각을 읽고, 남의 똥 치우다 가는 거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책 속에는 책을 쓴 사람의 길이 있을 뿐, 나의 길은 없다. 나의 길은 나에게만 있다.”

노자 초상.

 - 노자를 강의하고 책을 쓰는 이유는.

 “결국 자세의 문제다. 노자를 배울 때 지식을 흡수하려는 게 아니라 노자의 사유를 제대로 받아들여 그와 맞먹어 보겠다는, 또 다른 노자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해야 한다. 그러려면 노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보다 노자가 그 말을 하게 된 역사적 조건을 알고 그 사유의 높이에 동참해야 한다. 노자의 사상에 대한 오해가 많다. 이를 바로잡으려 했다.”

 - 어떤 오해인가.

 “노자의 사상을 현실도피적이거나 신선사상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렇지 않다. 철저히 현실적이며 매우 정치적인 사상이다. 시대적으로 노자와 공자는 둘 다 신의 권위가 쇠퇴하고 인간의 지위가 상승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공자는 인간의 내면적 본성, 즉 인(仁)을 토대로 보편적 기준을 만들고 예(禮)를 향해 나가는 것이 인간의 길이라고 봤다. 반면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노자는 인간의 본질이나 토대 자체를 부정한다. 모든 것은 유(有)와 무(無)의 관계로 이뤄진다고 봤다. 이런 ‘관계론’ 철학은 모더니즘 이후의 세계와 잘 부합한다. 노자를 ‘현대철학자’라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 요즘 한국사회에도 메시지가 있을까.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이념갈등 아닌가. 이념이나 신념은 인간을 어떤 본질을 가진 존재로 보는 데서 생겨난다. 본질을 인정하면 이상적 단계가 설정되고,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 구분을 하게 되고, 이는 곧 이단 배격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념은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 새롭게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이다. 노자는 인간과 세계를 비본질적인 것으로 봤다. 노자의 핵심사상 ‘무위(無爲)’는 간단히 말하면 ‘봐야하는 대로 보지 말고 보여지는 대로 보라’는 것이다. 어떤 이념을 설정해 놓고 세계를 보지 말고, 변화하는 구체적인 세계를 읽어 자신의 문법을 만들라는 것이다. 인문학이란 결국 그런 ‘인문적 레벨의 시선’을 가진 인간을 키워내기 위한 거다.”

 - 인문적 레벨의 시선이라는 게 뭔가.

 “인문(人文)은 말 그대로 인간이 그리는 무늬다. 예를 들어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흐름을 읽은 후에, 새로 등장하는 인간의 욕망을 포착하여 자동차 디자인을 직선에서 곡선 위주로 바꾸는 능력 같은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세계의 변화를 관념적으로 포착해 그 흐름을 잡아내는 것, 시대의식을 장악하는 것, 새로운 문제를 발굴하는 것, 그것이 인문적 레벨의 시선이고, 거기서 창조가 나온다.”

 - 책에 나오는 ‘일반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 살라’는 말도 같은 의미인가.

 “노자는 줄곧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라’와 ‘자기로 돌아가라’를 강조했다. 나를 일반명사 속에 함몰되게 방치하지 말고 고유명사로 살려내라는 것이다. 노자뿐 아니라 모든 철학이 귀결되는 마지막 질문은 ‘네가 너냐?’다. 자기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설득력이 없고, 새롭지 않다.”

 최 교수는 ‘야성적 인문학 스쿨’을 표방하며 3월 문을 연 ‘건명원(建明苑)’의 초대 원장도 맡고 있다. 인문·과학·예술 분야의 최고 권위자들이 강사로 나서 19~29세의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1년 과정의 인문학 학교다. “다양한 사유거리를 던져 이들의 내면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 그 충돌의 힘으로 자기만의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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