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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요직 개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지난 25일부터 3일간 평양에서 열린 북한의 최고 인민회의 (의회)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경제·외교 분야의 요직 개편과 기구 신설이다.
경제 전문가로서 북한 기술관료의 정상급인 총리 이종옥이 행정원 부주석으로 승진했다.
부총리에서 총리로 올라간 강성산도 북한의 인맥에서 볼 때 박성철-이종옥 계열의 실용주의 그룹에 속해온 경제 전문가라 한다.
그 하위 급에 속했던 기술관료 그룹이 크게 신장 세를 보여 김만금·박수동 등의 지위도 격상됐다.
최고 인민회의는 또 경제정책 위원회를 신설하고 자본주의 국가와의 경제 관계도 추진할 의사임을 밝혔다.
외교 분야에서는 대남 공작을 맡아온 김중린이 해임되고 외상으로 있던 김일성의 조카사위 허담이 후임으로 가서 「조국평화 통일 위원장직」까지 맡았음이 확인됐다.
외상이 된 김영남은 당의 대외 연락부장으로 대외 정책 결정의 총책을 맡고있던 인물이지만 김정일과는 노선을 달리하는 실용주의 관료 파에 속해왔다.
이렇게 볼 때 예년보다 조기에 개최된 금년도 북한 최고 인민회의의 주요 과제는 파탄 지경에 이른 제2차 7개년 계획과 국제적 고립을 자초한 랭군 암살 폭파사건의 사후 수습에 있었던 것 같다.
북한의 내외 문제는 김정일이 김일성 후계자로 자리를 굳히기 시작한 80년 10월의 당 대회 이후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김정일의 권력 승계에는 김일성과 활동을 같이해온 제1세대의 김일성 파와 실용주의 노선을 걸어온 제2세대 온건파들, 그리고 군부 내의 다수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것은 권력 투쟁으로 발전하여 국내 경제에 혼란을 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생산의 감소, 물가의 은닉과 암거래가 횡행했다. 이에 관료들의 행정 혼란이 겹쳐 경제 계획은 마감 1년을 남기고도 성과는 50% 미달임이 북한 당국 자신에 의해 확인됐다.
김정일은 이 같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교조적인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체제 강화를 시도하여 대남 도발을 적극화했고 그것이 결국은 실패로 끝난 아웅산 만행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북한은 김정일 승계로 야기된 경제 혼란과 외교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 노선의 재조정이 불가피했다. 그 일부가 이번 최고 인민회의에서 표면화 한 것이다. 김정일 등장 후 비교적 뒷전에 머물러있던 김일성이 이번을 계기로 다시 표면에 나타나 친정 체제를 회복한 듯한 인상을 준다. 반 김정일 계의 등용은 김일성 자신에 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김일성은 우리의 경제 성장을 의식, 7개년 계획의 원만한 수행을 위해서는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부분적인 제휴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중공의 개방정책 모델을 모방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또 그동안 북한이 신조로 삼아온 자력 갱생의 고립·폐쇄적인 자주 경제 정책의 한계를 스스로 시인한 것이기도 하다.
3자 회담이라는 형식으로 대화 재개를 제의한 것도 이 같은 경제·외교적인 난국타개의 일환이다. 서방의 자본과 기술을 얻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1차 적인 급선무다. 북한이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갈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북한을 연구해온 학자들은 오늘의 북한 체제는 나치스 독일과 같고, 근대화는 북경에서 그 방식을 도입하려한다고 지적해왔다.
이번의 북한 움직임은 이 같은 예언에 한 발짝 접근했다는 인상을 준다.
김일성이 경제·외교상의 부분적 개방을 시도하고 실용적 온건 노선에 치중, 김정일 체제에 대해 다소의 견제 조치를 취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정일 승계 체제 자체에 어떤 변화가 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김일성이 친정 체제를 강화하여 이번 사태 수습에 직접 나선 것은 김정일의 과오를 선도하여 후계자로서의 그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는 배려에서 나왔다는 관측이 더 설득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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