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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인간이 부품으로|하루 "감사합니다" 천5백번 114안내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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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서울구로동 K약품주식회사 제조실. 공중전화박스처럼 알루미늄과 유리로 밀폐된 4각의 백색공간, 실험실·검사실·충전실 등 20여개의 방이 복도 좌우로 늘어서있다.
상오 8시20분 출근버스에서 내린 강미경양(23). 강양은 1자가 씌어진 도어앞에 선다. 자동문이 스르르 열리고 그안은 3평 남짓한 탈의실.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찌르는 하얀방에서 코트·겉옷을 벗어 사물함에 보관한다.
2번 도어앞, 역시 자동문이 소리없이 열린다. 세척실. 소독수로 손을 씻고 자동드라이어기에 손을 넣으면 『쏴』 쏟아지는 더운 바람에 손의 물기가 순식간에 말라버린다.
3호실, 흰 헤어캡, 하얀 마스크, 가운, 고무장갑으로 갈아입는다. 까만 눈동자만 빠끔히 드러낸 강양의 모습은 마치 우주선 조종사 같다.
4호실은 에어샤워룸. 벽의 빨간 버튼을 누르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바람이 몸에 붙은 먼지를 말끔히 훑어간다.
4단계의 준비과정을 거쳐 도달한 마지막 방이 강양의 하루 근무장소인 충전실. 마이신 주사약을 병에 주입하고 고무마개와 알루미늄캡을 씌우는 무균실(무균실)이다.
외부의 공기가 유입되는 것을 막기위해 실내공기의 압력은 외부보다 1.5∼2밀리바가 높게 양압되어있다.
『부-부-』 상오 9시 정각, 작업개시를 알리는 버저소리와 동시에 자동 컨베이어벌트가 움직이고 그위에 조그마한 앰플병들이 열병하듯 밀려온다.
자동으로 주사약을 채우고 고무마개를 씌운 마이신병은 알루미늄캡을 쓰기위해 캡핑기앞을 통과하고 있다.
강양의 역할은 약병을 1개씩 집어 캠핑기의 홈에 맞춰 세우는 것. 스탬프를 찍듯 기계가 움직일때마다 강양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약병을 홈에 끼운다.
엄지나 중지만으로 씌우면 갖다세우고 씌우면 세우고 동상처럼 앉아 두손만으로 작업을 한다. 강양 자체가 캡핑기의 한부분같다는 생각이 든다.
1분당 캠핑기 홈을 통과하는 주사약병은 30개. 강양은 3초에 한번씩 하루평균 1만5천번을 기계같은 손놀림의 반복을 해야한다.
이회사 생산직 근무사원은 약4백명. 고졸 60%, 중졸이 40%다. 초임은 12만원선. 3년경력의 강양은 매월 15만원을 받는다.
서울 을지전화국 114안내실.
상오 9시 근무교대를 한 김명희양(27)앞 안내대의 10개 호출램프에 황색불이 들어온다. 시민들의 번호문의 전화다.
응답버튼, 민첩한 손놀림으로 탁상위 CRT 컴퓨터 버튼을 누른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이 박힌 버튼을 타자치듯 두드리면 CRT스크린에 「김길동」의 전화번호, 주소가 나타난다. 한번 버튼에 12명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동명이인 「김길동」 「김길동」 「김길동」….
10개의 호출램프는 그동안도 쉬지않고 깜박거린다. 번호문의 독촉이다.
김양의 오른손은 컴퓨터버튼을, 눈은 스크린속의 「사당동 117의 김길동」을 추적하고 동시에 왼손으로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번호를 찾고있읍니다』라는 양해응답이 녹음된 버튼을 누른다. 누르고 쳐다보고 누르고. 2백50명 안내양들의 이 삼박자 동작은 마치 오키스트러현악파트의 연주장면과도 같다.
1건의 문의전화에 응답시간은 평균25초. 전화번호부와 기억력에 의존하던 때보다 3초가 단축되었다.
안내양 1명이 1시간에 처리하는 응답건수는 평균 1백20건. 1일 9시간 근무에서 『114입니다』 『감사합니다』의 두가지 업무용어를 l천5백번이상 반복한다. 통화버튼, 컴퓨터버튼 등 양해응답버튼을 누르는 횟수는 4천번이상.
『저자신 인간앵무새들의 합창, 기계적 동작의 로보트행진이란 착각을 할때가 있어요. 성취감도, 만족감도 없어요.』
김양은 하루근무가 끝나는 5시쯤이면 뒷목이 빳빳해지고 귓속이 멍멍하다고 했다. 7년 근무한 김양의 봉급은 28만원선.
전국에 1만8천9백여명의 교환안내양들이 김양같은 앵무새인생을 살고있다.
정창희군(22·D전자기능공)이 하는 일은 TV 뒷면의 조립나사를 죄는 일이다.
4백50종 7백개의 부품(19인치기준)이 들어가는 공정은 다시 1백50개로 세분되고 그 가운데 나사만 돌리는 파트도 10개가 넘는다.
정군은 TV 1대에 소요되는 76개의 나사가문데 3개를 죈다. 상오 9시부터 하오 5시까지 하루평균 6백대, 1천8백개의 나사를 죈다.
미완성TV가 한사람앞에 머무는 시간은 40초. TV 1대가 만들어지는 1백90분중 2백85분의1의 순간작업이 정군이 하는 일의 전부다.
『3년을 일하면서 아직도TV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모른다』는 게 정군의 솔직한 말. 생산의 중요부문을 기계와 컴퓨터가 맡고 인간은 단조롭고 반복적인 단순공정을 맡은 하급기계로 쓰이는 역설이 정군에게서 현실화되고 있디.
J반도체생산공장 제품검사실-. 검사대앞에 나란히 진열된 10개의 현미경. 그앞에 둥근 모자와 마스크, 우주복모양의 가운 등 하얀제복으로 통일한 10명의 아가씨들이 말없이 자동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이동, 일정한 간격으로 현미경렌즈앞에 오뚝오뚝 멈췄다가 다시 지나가는 사방 3∼4㎜크기의 종이처럼 얇은 금속(칩)조각을 살핀다. 불량품이 발견되면 정확하게 핀센트로 찍어낸다 응시와 적출의 반복동작.
머리카락 10분의1두께의 가는 회로가 수십만개나 얽혀있는 칩의 이상여부는 전자현미경으로도 판별이 쉽지않다.
때문에 와이어본딩 등 제품의 조립상태와 품질검사는 자동컴퓨터검사기가 맡는다. 검사원들은 다만 육안을 통해 체크되는 불량품을 골라낸다.
역시 인간이 기계에 우선권을 빼앗긴 현장이다. 오늘의 기계문명은 엄청난 생산력과 편리의 증대 그늘에서 이같이 인간의 부품화, 기계화를 가속시키고 있다. 인간이 발명한 기계의 시중을 드는 역설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서울대 장병림교수는 『인간이 자신의 창의력이나 사고와는 관계없이 단조로운 단순동작을 반복할때 허탈감, 우울증, 병적히스테리 등 정신이상증세를 유발시킬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산업사회속의 현대인은 변화없는 작업환경, 무미건조한 일상이 주는 자기소외의 고독감속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김창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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