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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국내진정작전|발굴자료와 새증언으로 밝히는 일제통치의 뒷무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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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l940년대로 들어서면서 항일운동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몇몇 독립단체는 항쟁을 계속했고 종전무렵엔 군사진공작전을 시도했다.
군사력에 의한 국내진공은 일본의 패전이 뚜렷해진 마당에서 전후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발언권을 높인다는 점에서 그나름의 명분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해방후 정치적 지도세력이 없어 정국이 혼미를 거듭한 사실을 생각하면 명확하다. 백범 김구도 전후 한국의 발언권이 약해지고 외세의 개입을 불러 오리라는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중국의 서안에서 일제의 항복소식을 듣고도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실망을 느꼈던 것이다.
김구가 임시정부산하에 광복군을 조직, 군사력에 의한 조국해방을 기도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종전을 앞두고 국내에서 있었던 두차례의 국내진공계획은 잘 알려져 있지않다. 건군동맹의 여운형 박승환 등에 의한 것과 박시목 김시현 등을 중심으로 추진한 운동이 그것이다.

<건국동맹의 국내진공작전>
여운형은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했다.
이계획의 핵심인물은 당시 만주군 현역중위였던 박승환이었다.

<국제적 발언권위해>
여운형은 44년 봄 일제의 협력을 거부할수 없게되자 양주군 봉안으로 은퇴했다. 표면적으로 은거를 내세웠으나 지하조직을 확대하고 동지의 규합을 위해서였다.
이동화(현 민주사회주의 연구소장)의 증언.
『여운형은 44년 8월 비밀지하조직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일제의 패망후를 대비해 여러가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의 중심은 전쟁후 국제적 발언권을 얻기위해 군사력에 의한 무력투쟁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국내사정으로는 국내활동이 어려웠고 따라서 만주로 방향을 돌렸다. 만주안에 있는 한국인들을 모아 무장단체를 만들고 연안에 있는 무형의 조선의용군과 합세, 국내진공작전을 시도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에는 중경의 임시정부도 끌어들여 대일 단일수립전선체를 만드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방이 예상보다 일찍 닥쳐와 실패로 끝났다. 연안의 조선의용군과는 몇차례 협의까지 거쳐 만주에서 조직된 무장단체까지 통합 지휘한다는 원칙까지 세웠으나 임시정부에는 미처 연결을 하지 못했다.
이 계획에는 박승환중위가 주동이 됐다. 여운형은 이미 오래전부터 박을 알고있었고 건국동맹이 조직되기 전에도 그를 만주로 보내 그곳 정세를 보고하게 했다. 박의 임무는 만주군내의 한국인을 모으는 문제와 무기장만, 만주에서의 군대조직, 연안의 조선의용군과의 연락 등이었다.』
박승환의 만주에서의 활동은 전혀 알려져있지 않고 단편적으로만 전해질 뿐이이다. 이 계획에는 당시 일본군 육군중장 홍사익도 가담한 것으로 전해진다. 홍사익은 전후 필리핀의 일본군 포로수용소장으로서 연합군사령부에 의해 46년 총살형이 결정되기도 한 인물이지만 그가 필리핀으로 전출되기까지 박승환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있었고 임시정부와도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랬기때문에 그가 전후 총살형으로 결정되자 김구 등 1백80명이 서명, 그의 구명운동을 벌인바 있다.

<박승환이 계획주도>
박승환의 활동에 대한 박명근(박승환의 조카·현 대한투자신탁사장)의 증언.
『박승환은 경성 제2고보시절부터 여운형과 알고 지냈다. 그가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것은 그가 원하기도 했지만 여운형도 훗날의 독립운동을 위해 권했다고 한다.
그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 만군에 근무하면서 여운형과 자주 연락했고 44년 봄 병가를 얻어 휴양명목으로 여운형이 머물고있는 근처에 방을 얻었다. 그의 병가사유는 관절염이었는데 폐도 나빴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만군에는 여러사람이 이 계획에 가담했으나 구체적 인원은 알수없고 문용채 박창륜 등이 가담한 것으로 들었다. 문은 당시 만군 헌병대위로 중요한 문서의 연락은 그가 맡았다.
박창륜도 함께 일한것으로 들었으나 내용은 알지 못한다. 박은 6·25때 대대장으로 싸우다 전사했다.
박승환은 해방후 만주에 들어가 잔류부대를 데리고 국내에 들어오다가 북에 붙잡혀 죽음을 당했다.
그들은 여운형등을 기회주의자로 보았기 때문에 박을 처형한 것같다. 그러나 여운형도 박도 민족주의자였다. 해방이 좀더 늦어졌더라면 국내진공계획은 어느정도 성공할수 있었을 것이다.
박은 해방 열흘전쯤 송별회를 갖고 만주로 떠났는데 나는 당시 중학생이어서 구체적인 내용은 몰랐으나 송별회의 분위기가 몹시 결의에 자있어 작전이 거의 임박한 것으로 짐작됐다.』
국내 진공작전에는 박승환 외에도 여러인물이 참여했다. 여운형은 박승환을 만주에 보내는 한편 이영선을 북경으로 파견, 주로 연안과 연락하며 그곳 정세를 보고하게 했고 이상백을 와세다대학파견 연구생으로 북경에 보내 중국 전체를 순회하며 정보를 수집토록 했다.
또 국내에서는 조동우·이림수 등이 연락책임을 맡았다.
44년 12월에는 중국 요현으로부터 무정의 연락원이 찾아와 북경에 있는 이영선·이상백 등과 회담했고 45년 4월말 박승환을 직접 연안에 보내 조선의용군과의 항일협동작전을 논의했다.
또 5월말에는 중경임시정부에 국내사정을 전달하고 합동전선을 위해 최근우를 파견했으나 북경까지만 가고 중경까지는 가지 못했다.
6월에는 연안으로부터 8월29일 연안에서 개최 예정인 국치기념대회를 계기로 국내외의 정세보고를 위해 건국동맹에서도 자료를 보내달라는 요구가 있자 여운형은 정세보고서를 박승환의 부인 김순자를 시켜 북경의 이영선에게 전달하게 했다.
여운형은 건국동맹의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면서 44년10월 별도로 농민동맹을 조직, 항일운동을 준비했다. 그 중심인물은 여운형외에 김용기·이장호 등 13명이었다. 활동목표는 적 후방에서 식량공출 등 전쟁군수물자 수송방해, 청년들의 징병·징용기피운동, 그 근거서류인 호적부의 파괴였다. 그리하여 청년 수십명을 의사와 짜고 허위진단서를 발급, 징병·징용을 피하게하고 용문산·예봉산에 피신시켰다.

<농민동맹 별도추진>
이와함께 여운형은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후방을 교란할 목적으로 노농군의 편성에 착수했다.
이 무렵 「엔도」(원등)정무총감은 여운형에게 중국과의 화평을 위해 중국행을 권유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한 이동화의 증언.
『여운형은 당시 국민당군과 팔로군에 안면이 넓었다. 특히 왕정위와는 친숙한 처지였다. 이런 점을 계산한 일본은 45년초 여운형에게 중일화평을 위해 중경정부와 교섭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연안으로 가서 팔로군 당국과 접촉, 일본과 팔로군간의 국지적 화평이라도 실현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일본은 그 전에도 여운형을 통해 중국과의 교섭을 시도하려 한 적이 있었다. 우리들은 생각끝에 여운형에게 중국행을 권했다. 그것은 그가 중국에서 국내진공작전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과 당시 국내사정이 위험해 차라리 교섭명목으로 출국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계산에서였다.
「엔도」는 여운형의 승낙을 얻고 북지군사령관 「다까하시」(고교)와 연락, 그가 서울에 직접 올 예정이었고 그 선발대로 「마나베」(진과)가 도착했다. 그런데 이때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폭이 투하됨으로써 일본이 항복, 국내진공작전은 계획단계에서 실패로 돌아갔다.』

<박시목·김시현의 국내진공작전>
이 운동은 박시목·김시현외에 이종욱·권태석 박진목 등 수십명이 가담했고 특이한 것은 일본인「기따하라」(북원)도 끼여 있었다는 점이다.
이 작전에 직접 가담했던 박진목(전 통일일보부사장)의 증언.
『당시 국내진공작전에는 국내와 국외에서 동시에 추진됐다. 시목형님은 동경 상지대학 철학과를 나온뒤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의원, 신간회동경지회장을 지냈다.

<산해관서 일에 체포>
42년 겨울 나는 대구에 머물고 있었는데 시목형님이 나를 서울로 불렀다. 국내진공작전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 동지를 규합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북경으로 떠나고 몇달후 봉천에서 재회했다. 봉천에서 구체적 지시를 받은 나는 국내로 돌아와 김선기·심재윤·김찬기(김창숙의 아들)·노석호 등 동지와 숙의했다.
국내의 활동 경비는 제사공장을 경영하는 김교식이 댔고 43년 여름에는 심재윤·김찬기·노석호 등이 중국으로 떠났다.
시목형님은 봉천에서 해외와 국내간의 연락을 맡아 동지들을 연안으로 보내고 기금모집활동에 주력했다. 그후에도 계속 동지들을 중국으로 보냈다. 허룡출 홍경조 등이 경제적 도움을 주었고 대구 본정여관주인 황봉이여사·곽재순 등이 협조했다.
우리 운동의 목표는 만주와 중지에 산재해 있는 독립군과 연안의 조선의용군·중경임시정부·미주독립단체를 연결, 하나의 단일독립운동전선체를 형성하고 대일선전포고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봉천을 왕래하면서 연락임무를 맡았다.
그런데 어느날 노석호와 조카 희규가 연안에서 봉천으로 오는 도중 산해관에서 일본관헌에 체포되고 북경에서 시묵형님과 김시현 등 50여명이 검거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이어 국내에서도 검거선풍이 몰아쳤다. 나는 44년 5월15일 대구경찰서에 수감됐다. 거기에는 이상훈·김선기 등 15명이 있었다. 엄한 취조끝에 치안유지법위반죄로 김선기·고용준·김태주·박태호·조카 희돈, 그리고 나 6명이 형무소에 이감됐다. 당시 북경에서 체포된 사람은 많이 죽었으나 국내에서 검거된 동지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시목형님과 조카 희규는 북경에서 옥사했다.
국내에서 동지들을 모아 중국으로 보내는데는 2개의 루트가 있었다. 하나는 시목형님을 중심으로 한 것과 김시현을 중심으로한 루트였다. 김시현도 븍경에서 체포됐으나 국내에 이송되어 목숨을 구했다. 당시 김시현을 데리고 나온 것은 이종형이었다. 그는 해방후 반민특위에 체포될만큼 친일행각이 두드러졌다. 그는 김시현과 친분이 있었기때문에 그를 구하기 위해 일부러 국내로 데려온 것이다.
이로 인해 내집안과 김시현과는 오해가 생기기도 했으나 김시현에 대해 의심할 점은 없었다.』
김시현루트는 이종욱·유석현 등이 국내에서 활약했다.
유석현의 증언.
『우리 사건에는 일본인「기따하라」도 관계했다. 공산주의 운동에서 전향한 그는 당시 북경에서 일본의 비밀공작원으로 있으면서 국내진공작전의 연락업무에 관계했다. 나는 한때 친일승려로 지목받았던 이종욱 등과 국내에서 자금과 동지들을 모았다.
당시 북경에는 김정묵이 여관업을 하면서 임시정부와 연결했다. 우리는 김시현루트를 이용, 국내의 청년들을 수십명 보냈다. 평안도·강원도의 산속에는 징병·징용을 피해 숨어있는 청년들이 많았고 이중에는 천도교인이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천도교의 이응진·김현국 등과 연결, 이들 청년을 규합, 회령·무산·위원·벽동 등지로 모이게 했다.

<승려 이종욱 자금책>
위원·회령에는 각각 일본군이 주둔해있어 무기와 동지들이 규합되면 선전포고를 하고 게릴라전을 벌일 계획이었다. 자금은 이종욱이 맡았다. 월정사 주지였던 그는 각 사찰을 돌며 자금을 마련했고 김찬을 연안으로 보내 무기반입을 교섭했다. 김찬은 조선공산당의 창당멤버였으나 해방후 전향했다. 그런데 무기는 오지않고 도중에 발각된 것이다.
김시현이 목숨을 건진 것은 이종형의 덕분이었다. 이종형은 처음 항일에 가담했으나 목숨을 건지기위해 친일대열에 섰고 독립투사를 잡아들이는데 앞장섰다. 그는 김시현과도 친하게 지내면서 밀정노릇도 했다. 그가 김시현을 구하기위해 국내로 데려온 것은 양다리 걸칠 속셈에서였던 것 같다. 일제와 독립운동자에 함께 협조해 보신을 꾀한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이때 고양군의 보광사에 피신, 무사할수 있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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