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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으로 덮인 마음에 사랑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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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호 14면

데이지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눈 앞에 있는 셔츠들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개츠비는 옷장에서 산호빛과 능금빛 초록색, 보랏빛과 옅은 오렌지색의 줄무늬 셔츠, 소용돌이무늬와 바둑판무늬 셔츠들을 꺼내어 데이지 앞에 던졌고, 데이지는 그 부드럽고 값비싼 셔츠들에 머리를 파묻고 울었다. “슬퍼져요. 난 지금껏 이렇게…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를 본 적이 없어요.”

이진숙의 접속! 미술과 문학 <9> 『위대한 개츠비』와 타마라 렘피카

F. 스콧 피츠제럴드(1896~1940)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1925)의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다. 데이지는 개츠비의 첫사랑이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은 꿈으로 남는 법. 개츠비에게 첫사랑 데이지는 “아무리 꿈꾸어도 부족하지 않을 불멸의 노래”였다.

데이지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예술작품이 아닌 ‘아름다운 셔츠’라는 상품에 눈물을 터뜨리는, 좀 독특한 감성을 가졌다. 흔히 생각하는 ‘첫사랑의 여인’이 아니다. 그 얼굴에는 “좀 어리벙벙하지만 매력적인 웃음”이 있었고, 그 목소리에는 “잊기 힘든 어떤 흥분, 노래하는 듯한 충동…즐겁고 신나는 일이 생길 거라는 약속”이 들어있었다. 한마디로 그녀는 “부유하고 충만한 삶” 자체였다. 개츠비는 ‘데이지라는 환상’을 향해 멈추지 않고 달렸고, 갑부의 대열에 합류했다.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흥미로운 점은 ‘위대한’이라는 형용사의 함의다. 도대체 무엇이 위대하다는 말인가?

첫사랑 데이지, 하지만 이미 닳고 닳은…
이 소설은 파티에서 시작해 파티로 끝난다. 배경은 소위 ‘재즈 시대’ 혹은 ‘광란의 20년대’라고도 일컬어지는 1920년대의 미국. 1차 대전 이후 미국은 유례 없는 호황을 맞이했다. 군수품 제작 기술이 자동차, 라디오, 냉장고 같은 소비생활 증진을 위한 물건을 만드는 데 쓰여졌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들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흐르는 재즈에 몸을 맡겼다. 허무와 퇴폐의 시대였다.

롤스로이스 버스가 사람들을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실어날랐다. 개츠비의 ‘위대한’ 저택에서 벌어지는 ‘위대한’ 파티에서 사람들은 의미도 모르고 흥청댔다. 하지만 매일 밤 이어지는 광란의 파티는 개츠비에게는 데이지를 위한 ‘위대한’ 초대장이었다.

소년 시절의 개츠비는 생활계획표를 짜가며 생활했던 성실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에게 생기는 건 아이들 뿐”이었던 시대, 돈을 위해서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속임수를 썼다. 청교도들의 국가 아메리카, 그 아메리칸 드림은 숨길 수 없이 부패하고 있었다. 그토록 성실하던 개츠비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은 검은 사업에 뛰어드는 것 밖에 없었다. 어마어마한 파티 비용은 밀주 판매, 훔친 증권 불법 판매 등 조직폭력계 두목과 손잡고 벌인 검은 사업에서 나온 돈으로 충당됐다.

개츠비의 파티에 마침내 데이지가 나타났다. 개츠비의 저택은 은밀한 밀회의 장소가 됐다.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어요.” 5년 만에 데이지를 재회한 개츠비는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데이지의 목소리 속에 담겨있던 “즐겁고 신나는 일이 생길 거라는 약속”은 사실은 돈의 약속이었다. 데이지는 “하얀 궁전 속 저 높은 곳에 공주님”, “황금의 아가씨”였다. 황금으로 된 마음에는 사랑이 오래 깃들지 못한다.

개츠비가 그토록 사랑했지만, 그녀는 개츠비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조문의 전보 한 통, 꽃 한 다발 보내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데이지는 자신의 표현대로 “아주 닳고 닳은 여자”였다. 그녀는 1920년대에 등장했던 새로운 유형의 인물이었다.

타마라 렘피카의 ‘초록색 부가티를 탄 자화상’(1925).

경제적·성적으로 자유로운 신여성
공교롭게도 여류 작가 타마라 렘피카(1898~1980)는 소설이 발표되던 해 흥미로운 자화상을 한 점 완성한다. 그녀의 저 유명한 ‘초록색 부가티를 탄 자화상’은 ‘재즈 시대’의 전형적인 인물상을 보여준다. 렘피카가 운전하고 있는 차는 이탈리아산 최고급 수제차 부가티로, 그때나 지금이나 절대적인 부의 상징이다. 렘키파는 당시에는 이 꿈의 자동차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그림에 담겨있는 욕망은 더욱 거세게 가동한다. 차갑게 번쩍거리는 도회적 감각이 화면을 지배하고 있다. 렘피카의 눈빛은 퇴폐적이면서 유혹적이다. ‘소프트 큐비즘’이라고 불린 렘피카의 화풍은 유행 사조였던 큐비즘을 자기식으로 해석한 매우 절충주의적인 것으로, 도시적이고 산업적인 질감을 매력있게 표현했다. 렘피카는 당대의 부유한 인사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초상화가였다.

그림 속에 렘피카는 직접 운전대를 잡고 있다. 이 모습은 1차 대전 이후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여성을 보여준다. 전쟁 중엔 부족한 남성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늘었다. 선거권과 경제력을 갖게 된 신여성(New Woman) 혹은 현대 여성(Modern Woman)들이 등장했다.

“유행 따라 차려 입은 말괄량이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여준 광고”들이 성공했으며, 여성들은 은연중 그런 모습을 선망했다. 변화하는 여성상에 대해 부정적으로 사용된 용어가 플래퍼(flapper)였다. 대략 왈가닥을 의미하는 이 여성들은 샤넬 풍의 짧은 치마를 입고, 담배를 입에 물고, 재즈에 맞춰 몸을 흔들고, 성적으로 개방적인 여성들이었다. 플래퍼는 “쫓아다니는 남자한테 운전대를 맡기지 않고 직접 당당하게 핸들을 잡았다. 아무 거리낌없이 섹스를 입에 올리기도 했다.” 개츠비의 파티에 모여들던 술 취한 여자들도 이런 플래퍼들이었다.

렘피카 자신도 성공과 야망을 위해 질주한 ‘광란의 20년대’의 인물이었다. 폴란드 귀족의 딸로 태어나 러시아의 부유한 변호사와 결혼했으나 혁명이 발발하자 망명, 파리에서 한때 보석을 팔면서 살아가야 했다. 그녀에게 그림이란 사교계 인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여러 남성들과의 떠들썩한 스캔들 끝에 무능력해진 남편을 걷어차고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는데 성공했다. 차가운 욕망 기계로 자신을 표현한 렘피카의 자화상은 “호색적인, 마법적인, 퇴폐적인 것의 시대적 자료로서 인정” 받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개츠비 역시 저 그림 같은 상황 때문에 죽었다. 그날 분명히 개츠비의 최고급 신형 자동차를 운전한 사람은 데이지였다. 데이지가 운전하는 차에 뛰어든 여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연인이 일으킨 뺑소니 사고를 스스로 뒤집어쓴 ‘위대한 개츠비’는 그 때문에 살해당한다.

그의 장례식은 초라했다. 그의 파티에 드나들던 그 많던 사람들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개츠비로 대변되었던 아메리칸 드림의 쓸쓸한 죽음이었다. 실제로 소설이 발표되고 4년 뒤인 1929년, 미국에서는 대공황이 시작됐고 모든 아메리칸 드림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러나 이 소설을 발간할 무렵 29살 젊은 피츠제럴드에게는 거짓에 물든 시대에도 개츠비를 통해서 지키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개츠비의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 “부패하지 않은 꿈”이었다. 개츠비의 ‘위대함’은 시대의 지리멸렬함과 부패 때문에 더욱 빛나는 것이다. 그 꿈은 부패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그 꿈에 도달하는 방법은 철저히 부패했다.

결국 이 맥락에서 ‘위대한’ 단 한 사람은 소설가 피츠제럴드다. 위대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타락하고 부패해지는 역설, 결국에는 “일관성도 없고 엄청나기까지 한 몰락”을 멋진 언어로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에 피츠제럴드의 소설은 위대해졌던 것이다.

이진숙 문학과 미술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각 시대의 문화사 속 인간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위대한 미술책』『미술의 빅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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