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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망국의 주범 ‘철모자왕’ 경친왕 … 시진핑·왕치산 왜 연이어 거론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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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쩡칭훙 전 중국 국가부주석(왼쪽)과 부정축재로 청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경친왕. [중앙포토]

“조사와 처분을 받지 않는 철모자왕(鐵帽子王)은 없다.”

 중국의 양회(兩會·정협과 전인대) 개막을 하루 앞둔 지난 2일 뤼신화(呂新華) 정협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반(反)부패 성역은 없다고 선언했다. 뤼 대변인은 지난해 같은 자리에서 저우융캉(周永康) 전 정치국 상무위원의 처벌 가능성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니둥더’(??的·당신도 알잖아)라고 답변해 일약 ‘유행어 제조기’로 떠오른 인물이다.

 철모자왕은 청(淸)대 세습되던 특수한 왕의 작위를 말한다. 청조는 황제의 아들이나 황제를 제외한 형제인 친왕(親王)의 아들은 아버지의 작위보다 한 등급 낮은 작위를 받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철모자왕에 책봉되면 매년 1만 냥의 은과 쌀 500섬을 받는 특권을 자자손손 물려줄 수 있었다. 청조 268년 동안 철모자왕은 초대 황제 누르하치의 둘째 아들 예친왕부터 건륭제의 증손 경친왕(慶親王) 혁광까지 열두 가문에 불과했다. 철모자왕이 핵심 특권층의 대명사로 사용되는 이유다.

장징궈(蔣經國)

 철모자왕이 올 양회의 유행어로 떠오른 데는 정치에 역사 인물을 활용하는 중국 특유의 ‘역사 정치’가 숨어 있 다.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문화대혁명도 ‘역사 정치’로 시작됐다. 1961년 베이징 부시장 우한(吳?)은 명나라의 충신 해서(海瑞)가 황제에게 직언했다가 파면당한 내용을 다룬 희곡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펴냈다. 4년 뒤 마오쩌둥(毛澤東)은 위태로워진 자신의 권좌를 다지기 위해 이 책을 활용했다. 마오는 이 책이 그에게 직언하던 펑더화이(彭德懷)를 59년 숙청한 사실을 암암리에 비판하고 있다며, 상하이시 정책연구실의 야오원위안(姚文元)을 부추겨 우한을 비판하는 글을 문회보에 게재했다. 이를 계기로 문혁의 피바람이 시작됐다. 71년에는 쿠데타를 기도한 린뱌오(林彪)와 공자를 비판한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을 일으켰다. 모두 현실 정치에 역사를 활용하는 영사사학(影射史學)의 악습이었다.

 철모자왕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올 1월 13일 중앙기율검사위 5중전회에 참석해 한 연설에서 처음 등장했다. 중앙기율위가 지난달 25일 웹사이트에 ‘대청 나관(裸官·해외로 가족을 도피시킨 관리) 경친왕의 업무태도 문제’라는 글을 올리면서 철모자왕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졌다. 시베이(西北)대 역사과를 졸업한 왕치산(王岐山) 중앙기율검사위 서기는 역사 전문가다. 시진핑과 왕치산이 청 망국의 주범인 경친왕을 거론한 데는 다목적 포석이 숨어 있다.

 최후의 철모자왕인 경친왕은 형편없는 능력에 비해 관운이 좋았던 인물이다. 1884년 서태후는 자신의 환갑을 맞아 혁광을 철모자왕에 책봉했다. 이후 청조 멸망까지 27년 동안 그는 마지막 수석 군기대신과 내각 총리 대신을 역임하며 외교·해군·재정을 좌지우지했다. 업무에 바빴던 경친왕은 퇴근 후가 더 바빴다. 연회·도박·투기 때문이다. 연회는 대부분 생일 축하연이었다. 청 황실의 친왕은 왕비를 다섯 명까지 둘 수 있었는데 경친왕은 여섯 명의 부인을 뒀다. 부인들과 여섯 아들, 열두 공주를 위한 연회가 매일 열렸다. 연회는 마작으로 이어졌다. 마작은 승진의 비밀 무기였다. 역시 나랏일에 바빴던 서태후에게도 마작을 가르쳐줬다. 거액을 잃어주며 환심을 샀다. 궁녀와 환관 태감까지 모두 마작으로 물들였다. 그는 젊은 부인을 황궁으로 보내 서태후를 보필토록 했다. 부인이 입궁할 때마다 가져간 은화는 손으로 나르기 힘든 양이었다. 당시 충신의 비난에도 서태후가 경친왕을 두둔했던 이유다.

 경친왕은 이재에 밝았다. ‘많건 적건 가리지 않는다’가 그의 방식이었다. 핵심은 관직 매매였다. 정찰제로 인기가 높았다. 단지귀(段芝貴)는 백은 10만 냥으로 헤이룽장(黑龍江) 대리순무(성장) 자리를 샀다. 경친왕은 시중에서 ‘경씨(慶氏) 회사 총경리’로 불렸다. 당시 베이징의 영국 타임스 특파원 모리슨은 경친왕이 HSBC에 712만5000파운드를 예치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찰스 다윈의 정원이 딸린 호화 주택이 2000파운드밖에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영국의 호화 저택 3562채를 살 정도의 거액이었던 셈이다.

 경친왕은 베이징의 요식업·오락업의 발전을 이끌었다. 당시 베이징은 연회와 마작패 섞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대중목욕탕·극장·차관·유곽이 불티났다. 1917년 경친왕은 79세에 숨을 거뒀다.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그제야 “혁광은 위안스카이(遠世凱)의 돈을 받고 태후에게 나라를 넘기라고 권했다. 대청 200년 천하는 혁광의 손에 끝장났다”며 시호로 치욕적인 의미의 ‘밀(密)’을 내렸다.

 잡은 ‘호랑이’(고위직 부패 공직자)를 풀어줬다가 결국 대륙에서 패퇴한 국민당의 사례도 거론했다. 24일 중앙기율위 사이트에 유명한 역사 극작가 류허핑(劉和平) 인터뷰를 통해서다. 류는 48년 장제스(蔣介石)의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화폐 개혁 책임자로서 추진한 고강도 반부패 전쟁을 거론했다. 장징궈는 상하이의 최대 마피아 두웨성(杜月笙)의 아들 두웨이핑(杜維屛)과 부패한 외사촌 쿵링칸(孔令侃)까지 체포했다. 그러자 쿵링칸의 이모이자 자신의 계모인 쑹메이링(宋美齡)이 나섰다.

 베이핑(北平·지금의 베이징)에서 공산당과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있던 장제스는 부인의 전화를 받고 상하이로 날아왔다. 장징궈와 부인의 주장을 들은 장제스는 “조화가 귀하다(和爲貴)”는 『논어』 구절로 답을 대신했다. 쿵링칸은 풀려났다. 장징궈는 “우리는 실패했다”고 탄식했다. 국민당은 이듬해 대만으로 쫓겨났다. 류허핑은 “반부패는 반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다. 일단 물러서면 천리의 제방이 무너진다”고 강조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27일 경친왕이 다음 ‘호랑이’ 사냥감을 암시한다며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 체포 가능성을 보도했다. FT는 경친왕의 경(慶)이 쩡칭훙 전 국가부주석의 ‘칭(慶)’과 일치하고, 쩡칭훙의 아들 쩡웨이(曾偉)가 2008년 호주 시드니에 2500만 달러(약 275억원) 상당의 고급 주택을 구매한 사실을 거론했다. 쩡의 지인을 인용해 최근 쩡칭훙 일가의 중국 내 소유 부동산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도 전했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경친왕이 특정 인물을 지목한 것은 아니라 경고 차원의 글이라고 쩡칭훙 타깃설을 부인했다.

 조영남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중앙기율위의 경친왕 글이 특정인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면서도 “쩡칭훙과 리펑(李鵬) 전 총리의 부정 축재는 논의됐던 사실이라 조사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말했다. 마오 시대 이후 역사 인물이 언론에 다시 등장하자 문혁식 ‘역사 정치’의 재현을 우려하는 목소리와 함께 망국망당(亡國亡黨)에 대한 경각심이 반부패의 동력이 될 것이라는 찬성 의견도 늘고 있다.

[S BOX] 『중국역사의 교훈』 펴낸 시화, 중앙기율위의 ‘붓대’

‘철모자왕(鐵帽子王·청대 세습 특권 왕족)’이 올 양회 키워드로 떠오르자 중국에서는 중앙기율검사위에 관련 글을 기고한 시화(習華·사진)에 대한 관심이 높다.

시화는 필명이 아닌 실제 이름이다. 중앙기율검사위에서 잔뼈가 굵은 시화는 매체를 총괄하는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 감찰실 주임을 역임했다. 현재 국가철로국 감찰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난징대 법학과 린런둥(林仁棟) 교수 밑에서 청렴정치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황쭝량(黃宗良) 교수에게 옛 소련 공산당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중국기검감찰보’에 기고한 24편의 글을 모아 올 1월 『중국역사의 교훈』이란 책을 펴냈다. 그중 ‘황제의 식비’ ‘옹정제의 다른 면모’ 등 6편이 제목을 바꿔 중앙기율위 웹사이트에 실렸다. 중앙기율위의 대표적인 ‘붓대(筆杆子)’로 불린다.

“권력은 총에서 나온다”고 한 마오쩌둥이 “혁명은 총대(槍杆子)와 붓대에 기대야 한다”고 말한 이래 칼럼니스트는 핵심 요직으로 분류된다.

신경진 기자 shin.k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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