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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상태 빠진 대구 민심 "내년에 싹 다 갈아치울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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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대구의 하늘은 이틀째 뿌연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날씨까지 이럴 필요는 없다 아이가. 대구 경기요? 경기랄 것도 없지. "

지난 19일 대구 서문시장의 상가 번영회 사무실, 유홍렬(柳洪烈) 상무의 목소리에선 자조와 허탈이 진하게 배어 나왔다. 대구의 어음부도율은 지난해 11월 이후 5개월째 증가세다. 또 4월 실업률은 전국 7대 도시 평균(4.0%)보다 높다.

시장을 돌며 10여명의 상인을 만났지만 희망을 얘기하는 이들은 없었다.

택시를 타고 10여분 달려 중앙로역에 도착하자 향 타는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2.18 지하철 화재 참사가 난 지 석달이 지났건만 검게 그을린 역사 벽과 녹아내린 공중전화 부스 등은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전해준다.

"한나라당이 대구 시민들을 위해 한 게 뭐있노. 싹 다 갈아치울끼다. "

중앙로역 부근에서 만난 윤영호(36)씨는 '내년 총선에서 어느 당을 찍을 거냐'는 물음에 마치 화를 내듯 말했다.

지난 대선에서 대구 시민들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에게 보낸 지지율은 78%였다. 전국 최고였다. 앞서 2000년 16대 총선에선 11개 지역구를 모두 한나라당이 싹쓸이했다.

그러나 지금 '대구=한나라당'이란 등식은 위협을 받고 있다.

"대구 사람들 마음을 누가 알겠나. 두번씩이나 밀어줬는데도 한나라당은 정권을 못 잡았다. 대선에서 진 후 대구는 죽은 도시 같았다. 지난 2월 지하철 화재까지 겹쳐 모두가 정신적 공황 상태다. 이젠 아무도 믿을 수 없다. "

택시기사 이흥식(58)씨의 얘기다.

지난달 초 지역신문의 조사에 따르면 '내년 총선에서 현역 의원을 찍지 않겠다'는 응답이 70%에 달했다. 한나라당 대구의원 11명의 평균 연령은 62세. 당 소속 의원 전체 평균인 58.1세를 크게 웃돈다.

이 같은 노쇠화는 지하철 화재 사고 후 한나라당 의원들, 그리고 한나라당 출신의 자치단체장이 보여준 무기력함에 대한 비난과 맞물려 '싹 갈아치우자'는 여론에 불을 댕기고 있다.

이 틈을 비집고 민주당과 지역 내 40.50대 신진 개혁세력들이 발빠른 약진을 하고 있다.

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특보인 이강철(李康哲)씨를 대구시지부장에 임명하고 대구 공략에 시동을 걸었다. 최근엔 지역 명망가와 시민단체 관계자들을 상대로 한 영입 작업을 진행 중이다. 윤덕홍 교육부총리.권기홍 노동부 장관 등 대구 출신 고위 관료들의 총선 징발설도 무성하다.

여기에 영남대 김태일 교수.김준곤 변호사(의문사진상규명위 비상임 위원) 등 20여명의 지역 전문가들이 지난 3월 구성한 '화요공부모임'도 주목된다.

화요공부모임 멤버 중 이재용(李在庸) 전 남구청장 등 10여명은 지난 15일 '대구 정치개혁추진위원회' 출범을 선언했다. 6월 중순 창립식을 할 대구 정개추는 내년 총선에 대비한 정치 결사체다.

지난해 6월 무소속으로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해 38.8%를 얻었던 李전구청장은 "변화에 대한 대구시민들의 갈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섰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당장은 민주당과 거리를 두고 있지만 민주당의 신당작업이 탈 DJ.탈 호남의 모양새를 갖출 경우 '비 한나라당 연대'의 틀로 묶일 수도 있다.

물론 내년 총선에서 '대구=한나라당'의 등식이 깨질 것이라는 예측을 하기엔 아직 이르다.

여론조사업체인 에이스리서치센터의 조재목(趙在睦.44) 대표는 "대선 패배의 허탈감, 한나라당 의원들에 대한 실망감, 지하철 참사 등의 요인이 겹쳐 대구의 정치 민심이 요동을 치는 것은 분명하지만 민주당에 대한 거부감을 넘어서는 수준이 될지는 미지수"라며 "결국은 한나라당의 전당대회 결과와 공천 내용 등이 대구 민심의 향방을 최종 결정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에이스리서치의 4월 조사에서 盧대통령이 잘한다고 답한 대구 시민은 35%였다.

대구=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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