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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새 냉전 속에서도 경제교류는 활발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지난해 9월 소련 전투기가 KAL기를 격추한 직후의 동서관계, 그리고 11월에 제네바 중거리 핵무기 감축 회담 장을 소련 측이 박차고 나간 것을 기점으로 동서군축회담이 사실상 모두 중단된 이후의 관계는 50~60년대의 냉전시대 못지 않게 급격히 냉랭해진 것이다. 적어도 정치·군사적인 측면에서 동서관계는 위기지수가 높아졌다. 그러나 경제 쪽을 들여다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서로가 손을 더 내밀고 교역의 폭을 넓혀가면서 상호의존도를 심화시키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동서관계의 정경분리의 조짐이라고 할까. 최근 몇 가지 의미 있는 일들이 별로 주목을 끌지 않은 채 이루어졌다.
첫째는 요란스럽게 시작했던 대 동구권 경제제재 조치가 소리도 없이 폐기된 것이다.
지난 82년3월 구 공시 10개국은 폴란드의 계엄령 실시 및 자유노조탄압에 항의, 교역을 대폭 규제하는 경제제재를 가했었다. 이 조치는 일단 작년 말까지로 시한을 정하고 다시 검토한 후 연장여부를 결정짓기로 한 것인데 아무런 논의도 없이 자동 폐기됐다.
미국도 이미 지난해 8월 대소곡물수출을 재개했다. KAL기 사건당시「레이건」대통령은 대소경제제재조치를 다시 가하자는 주장을 묵살한 바 있다.
구 공시의 대 동구수입제재는 대상품목이 계속 빠져나가 작년 말에는 모피·시계·카메라 등 고작 1억 달러 어치도 안 되는 품목에만 적용됐을 정도로 실효성이 상실된 상태다.
둘째는 시베리아 산 천연가스가 4천8백km의 파이프라인을 타고 서유럽의 가정으로 직접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 사실이다.
금년 1월1일 첫 새벽 소련의 가스는 서베를린과 프랑스 등지로 공급되기 시작했다. 서베를린은 향후 2년 안에 연료를 1백% 시베리아 산 가스에 의존하게된다.
서독과 프랑스뿐 아니라 이탈리아·오스트리아·스위스 등 여러 서발국가들이 앞으로 시베리아 산 가스를 공급받게 된다.
소련으로부터 가스를 공급받기 위한 파이프설치 공사에 투입된 자금이 무려 30억 달러나 된다.
이 프로젝트가 착수될 당시 미국은 소련에 발목을 잡힌다는 이유를 내세워 『1939년의 나치-소련협정이후 최악의 계약』이라고 비난하면서 만약 강행되면 유럽주둔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까지 협박했었다.
미국의 우려가 들어맞을지는 두고 봐야할 문제이긴 하지만 연료파이프를 소련에 대고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동서관계로 보아 정치적으로 불안한 요인이 될 수 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셋째는 동서교역의 심화 및 증가추세다. 81~82년 계속 하락으로 치닫던 동서간의 상품교역량은 작년에 다시 증가로 발전됐다.
유엔의 유럽경제위원회(UNECE)에 따르면 지난해 서방측의 대 동구 수출은 3백60억 달러, 수입은 3백90억 달러로 모두 7백50억 달러로 집계되고 있다. 물량을 기준으로 해서 전년 비 4%증가한 것이다.
교역량의 단순한 증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동구공산국가들이 대 서방수출진흥정책을 펴고 있다.
헝가리는 1백50개회사에 정부의 대외통상국을 거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직접 무역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일선 지방관서에는 가능한 한 수출진흥업무에 주력하도록 시달했다.
폴란드도 1천3백 개회사에 대해 수출 가득 외화의 20%까지 보유할 수 있도록 하고 독자적으로 무역을 할 수 있는 재량권을 주었다.
불가리아·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소련 등도 이들 두 나라를 뒤쫓아 대 서방교역확대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동서간의 교역확대는 광물과 석유·가스등 에너지가 풍부한 소련과 원료가 부족한 유럽 및 일본, 그리고 식량이 부족한 동구권과 식량 잉여국인 미국·호주간에 상호보완적인 필요성으로 해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추세다.
최대 산유국인 소련은 서방에 대해 연간 2백억 달러의 기름을 수출하고 있는데 금년부터 시베리아 가스가 공급됨으로써 연료수출규모는 크게 늘어날 것이다.
OECD국가들이 소련 및 동구국가들로부터 수입하는 기름은 현재 전체 수입량의 8.1%에 달하고 있다. 80년에는 그 비중이 4.5%이었다.
반면 소련은 해마다 1백20억 달러규모의 식량을 미국 및 호주로부터 수입하고 있다. 작년에는 소련이 풍작을 기록했으나 그래도 약 2천만t이 부족한 실정이다.
동서간의 무역 대종은 따라서 식량과 에너지 등 1차 산 품이 7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동서간의 교역 내지 경제관계확대는 장기적으로 보아 긴장을 풀어 가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에 관측통들은 이러한 추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런던=이제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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