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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22. 구기 종목 참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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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자농구 대표팀 훈련장을 찾아 격려하고 있는 필자. 맨 왼쪽이 당대의 스타 김영기 선수, 맨 오른쪽이 신동파 선수.

1964년 도쿄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대표단의 성적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도마에 오르는 것이 '구기 종목의 전멸'이다. 장창선.정신조.김의태의 승리가 있는데도 말이다. 농구.축구.배구 등의 좌절을 통해 우리 경기력의 현주소를 뼈아프게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 종목을 둘러싸고 발생했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도 주먹구구식 한국 체육의 모습을 잘 드러냈다. 남자농구 예선전에서 빚어진 '문현장 쇼크', 축구의 기록적인 참패, 여자배구의 험난한 본선 진출 과정 등등.

도쿄올림픽의 서막을 연 것은 남자농구였다. 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요코하마에서 최종 예선이 열렸다. 한국과 쿠바.호주.태국.캐나다.인도네시아.멕시코.말레이시아.필리핀.대만 등 열 팀이 출전했다. 이중 성적 순으로 네 팀이 본선에 나가게 돼 있었다. 한국은 김영기 선수를 중심으로 김인건.김영일.정진봉.김무현 선수 등이 주축을 이뤘다. 에이스는 김영기 선수였다. 그는 당시로선 드물게 두 손으로 공을 자유자재로 다뤘다. 슛을 할 때 수비 선수가 달려들면 공을 다른 손으로 옮겨 던지는 등 기량이 출중했다.

우리의 예선 첫 상대는 쿠바. 9월 25일 열린 이 경기에서 우리 팀은 초반 열세를 딛고 후반 12분 49-48로 뒤집은 뒤 리드를 지켜 67-61로 이겼다. 김영기 선수가 29점을 기록했다. 이 승리가 결정적이었다. 한국과 쿠바가 5승4패로 동률을 이뤘지만 맞대결에서 이긴 우리가 승자 승 원칙에 따라 본선에 올랐다. 쿠바를 물리치는 순간 재일동포 여성들이 벤치로 달려와 김영기.김영일 선수 등을 붙들고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울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0월 1일 벌어진 멕시코와의 경기는 악몽이었다. 한국은 경기 종료 6초 전까지 75-74로 앞섰다. 멕시코는 일부러 파울을 해 한국에 자유투를 주는 극약 처방을 썼다. 자유투가 빗나가면 반격해 승부를 뒤집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문현장 선수가 연속 네 개의 자유투를 놓쳤다. 멕시코는 경기 종료 호루라기 소리와 동시에 역전골을 넣었다. 그 순간 관중석의 재일동포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일어서서 관전하던 나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국내에서 라디오 중계를 듣던 국민도 실망했으리라. 문 선수의 집에는 돌이 날아들었다고 한다.

사정은 축구나 여자배구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축구의 졸전은 참담했다. 60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여세를 몰아 본선에 진출했건만 기록적인 참패만 거듭했다. 체코와의 첫 경기에서 1-6, 브라질과의 2차전에서 0-5. 3000여 명의 응원단을 조직해 성원하던 재일동포들을 볼 낯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약과였다. 이집트에 0-10으로 무참히 패한 것이다.

식민지 시절 민족의 자존심이었고 일본 꺾기를 밥 먹듯 하던 한국 축구가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사실 한국의 경기력이 참패를 당할 만큼 형편없지는 않았다. 함흥철.조윤옥.김정남.김삼락 등 나중에 국가대표 감독까지 역임한 우수 선수들로 이뤄진 팀이었다. 그러나 당시 축구 대표팀은 코칭 스태프의 불화로 팀워크가 엉망이었다. 체육회에서 임원을 보내 조정하려 해도 효과가 없었다. 심지어 농구계 원로인 이성구씨를 고문으로 임명해 감독하도록 해 봐도 소용없었다.

이집트와의 경기에서 선수들이 성의없는 경기로 일관하자 실망한 재일동포 몇 분이 큰소리로 나무랐다. 그러자 한 선수가 이렇게 응수했다. "당신이 내려와서 한번 뛰어 보지 그래." 어처구니없는 언행이었다. 이 일로 국내외에서 축구팀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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