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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 막노동까지…제적학생 현주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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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공백 3년7개월
80년5윌17일 이른바「5·17사태」이후 학교를 떠나야했던 제적 학생들은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좌절감. 주위의 따가운 눈초리속에서 캠퍼스를 떠난 학생들은 공사판에서 막노동으로, 윌부책장사등으로 나날을 보내며 방황하고 괴로와해왔다.
「5·17사태」이후 제적된 학생은 모두 1천3백63명(정부 발표) . 이들중 복역중이거나 재판에 계류중인 2백여명을 제외한 l천1백여명은 높은 의식수준에 비해 사회에서는「문제아」로 낙인찍혀 이른바「창밖의 학생」으로 좌절하고 방랑했다.

<출판업>
제적학생들의 활동중 가장 눈에 띄는 분야가 출판계.
현재 이들에 의해 운영되는 출판사는 나남출판사(고려대 신계윤씨) 와 인간사 (고려대 박영식씨) , 한울출판사 (서울대 김종수씨)등 10여곳「청사」「민중」「학민사」 등은 출판활동이 활발한 편으로 꼽힌다.
이들이 경영하는 출판사는 이른바「의식교육의 교과서」라 할수 있는 서적을 주로 발간하며 동료 제적학생을 고용하거나 번역을 맡겨 생계를 돕고있다.
출판사에 취업, 번역이나 편집을 맡는 경우는 고정월급을 받으나 급료수준이 윌 25만원정도여서 어려움이 많다. 우리기획·금강기획·창작과 비평사·한밭출판사·웅진출판사·거름출판사·이삭출판사등에 1백여명의 제적학생들이 일하고있다.
고정직장을 갖지 않고 번역활동을 하는 것도 인기 직종. 80년 이후 이들에 의해 5백여권의 번역서적 (인문·사회계통) 이 출간 됐다는 추정이다.
원고료는 일본어번역의 경우 한장에 6백∼8백원, 영어는 8백∼1천원 꼴로 황모씨 (서울대 경제학과) 의 경우 한달 수입은 20만∼25만원선.
제적학생들이 몸담고 있는 출판사에서 지금까지 출판된 서적은 『민중』『사회사상개론』 (청사출판사) 『자본주의 이행논쟁』 (광민사)『지식인을 위한 변명』 (한마당) 「시대와 증언』 (한길사) 『소모임 활동입문』(풀빛사) 『전환시대의 논리』 (광장) 등이며 이 가운데 광장사의 『전환시대의 논리』 (저자 이영희) 는 판매금지조치가 내려졌다.

<취업>
제적학생들은 대학 학력을 인정방지 못하고 업체에서도「문제아」라는 선입견으로 채용을 꺼리기 때문에 자유로운 취업은 어려운 형평.
채모씨 (서울대 사대) 가 신용협동조합에 근무하며 박모씨 (전남대 영문과) 는 출판협회, 민모씨 (성대 무역학과) 는 민한당 국회의원비서등으로 일하고있다.
일단 취업을 했다가도 신분이 드러나면 퇴직압력을 받기 때문에 제적학생들은 심리적인 고통도 심한 편이다.

<단체활동>
취업이 어려운 제적학생들은 각종 종교·사회단체에 가입, 「비판자」로서의 활동을 계속하는 경우가 많다. 1백여명.
이들이 가입하고 있는 단체는 최근 구성된 민주화운동청년연합회롤 비롯, 도시산업선교회·가톨릭농민회·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공해문체연구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등10여곳.
이밖에 신학대학에 다니던 학생은 교회전도사등으로 일하며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자영업>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서점이나 다방·독서실등을 경영하는 실속파도 있다. 외대출신 김모군 (영어과)등 3명은 서울노량진에서「영재수학」이란 초·중학생용 수험지를 만들어 가정배달로 수입을 올린다.
김모군 (동국대 전자공학과) 은 이대 앞에서 다방을 경영하며, 정모군 (서울대)은 독서실을 경영중.
이모군 (서울대) 은 서울대 부근에서 광장서점을, 서모군 (고대 사학과) 은 서울충무로에 백사서당을 경영하고 있다.

<막노동>
전체 제적학생의 40%인 5백여명이 일자리가 없어 방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학생은 동료들이 경영하는 출판사나 서점등에서 주로 만나 취업정보를 주고받거나 서적을 돌려보기도 한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막노동이나 행상등을 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올 여름 무렵 특사자가 많았고 군입대한 학생이 제대하자 구직난이 더욱 심해졌다는 것이다.

<제적재수생>
고려대의 설모 (사학과4년)·박모 (정외과4년) ·조모 (행정과4년)씨등 10여명은 두 번씩 제적되었다가 구제 받은 소위「제적재수생」.
이들은 74년 긴급조치9호위반·민청학련사건에 관련되어 제적되었다가 10·26사태 이후인 80년2월28일 제적학생 전원구제방침에 따라 80년 1학기에 복교했었다. 그러나 같은해 5월17일 다시 제적되었다가 이번 조치로 재구제를 받게된 것.
세사람 모두 「사십불혹」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고 설모씨는 지금도 별 직업이 없는 실정이며 조모씨는 일본에 유학중. 부산미문화원사건때 주모자로 찍혀 한동안 수배를 받다 당국에 검거되었던 박계동군은 현재 외국유학을 준비중이고 그동안 뾰족한 일자리가 없어 운전사라도 하려고 몇번 운전면허시험을 보았으나 번번이 떨어졌다는 것. 제적 최다기록은 국민대 장모씨 (행정학과4년) 등 10여명. 이들은 71년 교련반대데모로 위수령이 내려졌을 때 제적을 포함, 이번까지 모두 세차례 제적된 기록을 갖고 있다.

<기타>
일부 운이 좋은 제적학생은 외국유학을 떠난 경우도 있다. 조모씨 (고려대행정학과) 가 일본에서, 이모씨 (서울대화학과) 는 독일에서 수학중.
또 일부학생들은 공단이나 농촌등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어 현실을 배우며 노동운동을 이끌고 있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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