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서울소년원에 온 작은 선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마술 한번 해볼래?”

선생님의 제안에 퉁명스럽게 고개만 끄덕였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 어차피 내 삶은 망가진 지 오래다. 절도ㆍ폭행으로 김천 소년교도소에서 1년2개월을 살았고 이곳 고봉중고등학교(서울소년원)에서 2년을 더 지내야 한다. 이미 빨간 줄이 그어져 버린 내 인생.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5월 고봉중고에 오게 된 정우(20·가명)의 이야기다.

그런 정우가 지난달 26일 마술 지팡이와 트럼프 카드를 들고 무대에 섰다. 학교 강당에서 열린 '봄맞이 페스티벌'에서다. 정우의 손짓 하나에 지팡이가 사라지고, 트럼프 카드 모양이 바뀌었다. 관객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번 행사는 40년 넘게 재소자 교화운동을 해온 박삼중 스님과 일본 유명 연예기획사 대표 다이라 데쓰오의 후원으로 진행됐다. 학교에서 준비한 현수막 양쪽 가장자리에 태극기와 일장기가 나란히 실렸다.

삼중 스님의 소개로 한국 소년원을 처음 방문한 다이라 대표는 이날 고봉중고 전교생에게 새 체육복을 선물하고 격려금 등을 건넸다. 삼중 스님도 평소 애장하던 이당(以堂) 김은호 선생의 그림을 기증했다. 다이라 대표는 “여기 있는 학생들 나이 때쯤 난 예능이 좋았고, 그 적성을 살려 여기까지 왔다”며 “학생들이 어디에 있든, 어디서든 각자의 재능을 찾아 마음껏 뽐낼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다이라 대표가 잘하면 여러분들을 스카우트해 간다고 하네요. 물론 제가 일본어는 전혀 못합니다만.” 삼중 스님의 농담 섞인 멘트와 함께 학생들의 장기자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노래와 춤, 마술, 개그 등 저마다 개성이 다른 15개 팀이 무대에 올랐다. 그중에는 ‘무대공포증이 있지만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로 올라온 민수(가명)도 있었다. 반주가 흘러나오자 이내 얼음이 된 민수. 그러자 객석에 있던 학생들이 함께 노래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용기를 낸 민수가 입을 뗐다. 함성이 쏟아졌다.

한 시간 넘게 열띤 무대가 이어졌다. 학생과 선생님들의 ‘막춤’ 경연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삼중 스님과 다이라 대표는 연신 손뼉을 쳤다. 공연 참가자들에게는 치킨 무료 이용권, 매점 10만원 이용권, 공기청정제 등 푸짐한 상품이 전달됐다. 한영선 고봉중고 교장은 “이곳 학생들은 사회에서 단 한 번도 ‘잘했다’ ‘네가 최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며 “잘했다는 칭찬 한마디만큼 이들을 움직이는 게 없는데 오늘 아마 그런 칭찬을 실컷 들은 기분일 것”이라며 뿌듯해했다.

현재 고봉중고에는 206명의 학생이 있다. 대부분 절도나 폭력 등을 행사해 10번 이상 경찰서를 들락거린 ‘문제아’들이다. 이곳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다시 제대로 살 수 있는 법’을 가르치려 한다. 전교생 중 90여 명이 검정고시를 준비 중이고 100여 명은 한식조리ㆍ제과제빵ㆍ사진영상ㆍ마술 등 직업훈련 교육을 받고 있다. 지난해에는 소년원 최초로 수능 시험장이 마련돼 24명이 대학에 합격했다. 정우 역시 다음달 마술을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한다. 정우는 “난 정말 문제가 많은 아이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아이들의 심리ㆍ상처 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며 “마술뿐 아니라 나중에는 심리학을 공부해 나 같은 아이들을 위한 청소년 상담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삼중 스님은 기자에게 “이런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사실 삼중 스님은 일주일에 세 번 신장 투석을 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스님은 이 시간이 그저 소중하다고 했다. “다이라 대표도 최근 몸이 좋지 않아 우리 둘 다 이번 행사에 끝까지 참여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는데 지금 우리 둘 다 아까보다 훨씬 표정이 좋아지지 않았어? 학생들에게 도리어 우리가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아.” 통역사에게 스님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다이라 대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의왕=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