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예고된 방송 사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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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 드라마의 15일 방영분을 보자. 일본 폭력조직 보스로 분한 출연자가 일본어를 내뱉는다. "고노 온나니 펜가 나카라타…" '이 여자에게서 볼펜이 안 나오면…'이라는 번역자막도 함께 나왔다. 그러나 여기서 '나카라타'는 '나카타라'로 말해야 맞다. 일본인이 들었다면 실소를 금하지 못할 엉터리 일본어가 버젓이 전파를 탔다. 문제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음부 노출'이 일어난 바로 그 날, 배우 데니스 오의 영어대사 자막엔 '의로인'(의뢰인)이라는 오타가 나왔다.

실수로 넘기기엔 너무 잦고, 치명적인 방송 사고들이다. 왜 이같은 일이 반복되는가. 우선 음부 노출 사고의 경우 담당 PD는 최종 편집본을 보지도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초치기'나 다름없는 빡빡한 촬영 환경이 그 이유다. 편집본을 봐야 할 시간에 다음 회를 촬영해야 했던 것이다.

스케줄에 쫓기다 보니 촬영을 일반인과 보조출연자가 뒤섞인 목욕탕에서 했다. 현장 통제가 극히 어려웠다는 게 주변의 얘기다.

이에 대해 제작 관계자들은 "우리의 드라마 제작 현실을 이해해 달라"고 말한다. 70분짜리 드라마를 '양산'해내는 상황에서 여유있는 사전제작은 어렵다는 것이다.

문제의 배경에는 지상파 TV 3사간의 과도한 드라마 경쟁이 자리잡고 있다. 시청률을 의식하다보니 드라마의 방영 횟수를 고무줄처럼 늘이거나 줄인다. 후속작이든 늘어난 방영분이든 졸속기획이 되기 십상이다. 게다가 스타 연기자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올라가 있다. 이래저래 제작예산은 부족해진다. 경비를 절감하려면 제작 기간을 단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시청자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구를 위한 '초치기 제작'인가.

다음달 지상파 TV는 낮 방송을 시작한다. '제작 현실'은 더욱 열악해질 것이다. 또 어떤 문제와 사고가 불거질 것인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정현목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