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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3만달러는 글로벌 히트상품 만들 절호의 찬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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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속엔 시대가 있다. 최근 한국 사회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히트상품 몇 가지를 살펴보자. 먼저 캠핑 용품. 가족과 함께 자연 속에서 즐기는 캠핑이 대표 여가문화로 정착하면서 시장은 2010년 1000억원대에서 2013년 4000억원대로 급팽창했다. 그 덕에 자동차 시장의 전체 규모가 줄어드는 중에도 SUV 판매는 꾸준히 증가했다. 아웃도어 패션, 식품 시장도 덩달아 호황을 누렸다.

쇼핑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지난해 설 연휴 동안 유동인구 데이터를 분석해 보니 공항·터미널을 제외한 가장 번잡한 장소는 다름 아닌 프리미엄 아울렛이었다. 백화점 성장은 정체된 반면 프리미엄 아울렛은 매년 두 자리 수 성장률을 기록 중이다. 신세계사이먼이 2007년 첫 매장을 오픈한 후 2011년 롯데백화점, 2014년 현대백화점이 가세해 3파전이 시작되었다. 최근 국내 유통업계의 또 다른 화두는 PB(Private Brand), 자체 브랜드다. 일반 제조업체 제품보다 30% 정도 저렴한 PB는 단순히 싸기만 한 제품이 아니라 저가이면서 양질의 제품이라는 신뢰를 얻고 있다. 품목도 과자·라면·전구·비타민까지 다양해졌다. 대형마트·편의점에서 취급하는 PB 상품의 비중은 각각 20%, 35%에 이른다.

이제 타임머신을 타고 1990년대로 가보자. 1992년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미쯔비시자동차의 레저용 차량이 자동차업계가 전반적으로 부진한 속에서 나홀로 호조를 기록했다. 틀에 박힌 관광·레저 시설보다 산을 선호하는 오토캠핑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싸고 좋은 상품을 찾는 소비자들이 급증하면서 1993년 아울렛, 이듬해에는 PB가 히트상품으로 선정된다.

한국, 20년전 일본 시장상황 빼닮아

20여 년 시차를 둔 두 나라의 소비시장은 쏙 빼닮았다. 배경도 유사하다. 일본은 1992년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달성했고, 한국은 올해가 그 원년이 될 것으로 보인다. 65세 이상 인구비율이 14% 이상인 고령사회로 접어든 시점은 일본이 1994년, 한국은 앞으로 3년 후로 예상된다. 한국이 일본식 장기 불황을 답습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크다.

일본 소비시장이 동력을 잃고 답보하는 동안 한국은 변화무쌍한 청춘기를 보냈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억눌린 소비욕구가 폭발적으로 분출되면서 일상생활의 고급화, 세련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패션(衣), 음식(食), 공간(住)으로 확장되는 발달 과정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견되는 ‘사치의 진화’ 흐름과도 맥을 같이 한다.

신흥 자본가들이 선조의 문장(紋章)이나 선망하는 가문의 상징을 본떠 만든 문장으로 옷과 마차를 장식했듯이 2000년대 초 한국의 신부유층은 명품 브랜드를 온몸에 휘둘렀다. 당시 잘 나가는 엘리트 직장인의 패션은 아르마니 정장과 에르메스 넥타이, 페라가모 구두와 까르띠에 시계로 완성되었고, 수입차 판매가 급증했다. 진품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 만들어진 짝퉁이 히트상품으로 선정되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90년대 일본은 OL(Office Lady)이, 2000년대 한국은 골드 미스가 명품 대중화를 이끌었다.

음식 사치도 양에서 질로 바뀐다. 중세 귀족들이 육류 음식들로 가득 찬 향연을 배가 터지도록 즐겼다면, 17세기 들어 다양한 향신료와 소스, 풍미와 씹는 느낌, 세련된 매너가 중시되면서 예민하고 날씬한 미식가들이 등장했다. 이후 코코아·커피·차가 유럽의 상류사회에 퍼지면서 기호식품 소비가 발달하고 대도시에는 커피하우스가 들어서기 시작한다.

한국은 2000년대 중반 웰빙 바람이 불면서 저칼로리 차 음료부터 유기농 식재료, 와인, 블루베리 등 건강에 좋고 독특한 음식에 대한 관심과 니즈(Needs)가 폭증했다. 새로운 음식과 맛집 정보는 SNS·블로그를 통해 순식간에 퍼진다. 최근에는 디저트가 유행이다. 테라스에 앉아 브런치나 이색 디저트를 즐기는 가로수길, 이태원 거리의 모습은 90년대 동경 오모테산도의 노천카페 모습을 빼닮았다.

의→식→주, 사치의 진화

지금 한국 소비시장의 핫 이슈는 집, 공간 꾸미기다. 가구부터 침구·식기류까지 자신의 취향에 맞춰 집안을 장식하는 소비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중견기업들이 주도하던 가구, 생활용품 시장에 자주(JAJU), 무인양품, 자라, H&M 등 국내외 대형주자들이 가세했다. 지난 12월 오픈한 이케아는 35일 만에 방문객 100만명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덕분에 계절이나 기분에 따라 단돈 몇 만원으로 집안 분위기를 바꾸는 공간 사치가 가능해졌다. 주(住) 생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18세기 유럽에서도 사치의 영역이 집안으로 확장되어 양탄자와 가구·도자기·은그릇 소비가 폭증했다. 독일의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는 집 밖에서 공공적으로 향유하던 사치가 집안의 개인적 활동으로 변화한 것을 두고 ‘사치의 실내화(室內化)’라 설명하기도 했다. 몸치장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다채로운 미식을 즐기다가 개성이 묻어나는 공간에서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자 하는 진화의 원리는 시대와 국가를 넘어 적용되는 듯하다.

IT 산업의 부상은 한국 소비시장 발달의 기폭제가 되었다. 휴대폰의 경우 일본보다 1년 늦은 1995년 히트상품으로 선정되었으나 이동통신 가입자 수가 유선전화 가입자 수를 앞서는 시기는 1999년으로, 한국이 일본보다 1년 앞선다. 현재 한국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90%에 근접하지만 일본은 50%를 겨우 넘는 수준이다. 양국간 기업 관계도 역전됐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한국기업이 일본의 기술과 마케팅 기법을 이전해오는데 주력했지만 2000년 이후 일본기업과 정부 관계자들이 한국을 방문해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테크’로 성장했다면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터치’에 강하다. 헬로키티·건담·도라에몽 같은 캐릭터는 게임·식품·화장품 등 다양한 제품에 활용되며 수십 년간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캐릭터 상품이 아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반면, 일본은 남녀노소 마니아층이 두껍다. 2014년에는 헬로키티의 40살 생일을 맞아 축하 이벤트를 벌였고, 디즈니 캐릭터 인형 츠무츠무(Tsum Tsum)를 수집하는 것이 직장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일본은 첨단기술을 사용하더라도 주로 고객 정서를 자극하는데 활용한다. 인형이나 장난감에 정성을 쏟고 외로움을 달래는 일본인 특유의 취향이 휴머니즘을 반영한 제품 개발로 연결되는 것이다. 90년대 후반 소니는 로봇 강아지 아이보(AIBO)를 출시해 25만엔이라는 고가에 출시했으나 17분 만에 3000마리를 판매 완료하는 기록을 세웠다.

또 일본인은 인내심이 강하고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수치스러워 한다. 식당에서 휴대폰 충전을 요구하거나 PC를 카페 콘센트에 꽂아 사용하면 ‘전기도둑’ 취급당한다. 당연히 휴대용 배터리가 필수품이고, 주변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땀 냄새, 자국을 제거하는 데오드란트가 매년 히트한다.

더 빠르고 더 편안하고 더 멋있는 상품을 끝없이 요구하는 한국 소비자들은 싫증도 화도 잘 내 상대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특성이 제품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제조 강국 대만에서 글로벌 브랜드가 탄생하지 못한 데에는 성실하고 온순하기만 한 국민성의 영향도 있다.

속도·기술보다 독창성·감성 추구해야

일본은 지금 하류화, 체념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아베노믹스의 영향으로 초호화 기차여행 같은 상품이 등장하긴 했지만, 저가·실용·위로 상품이 대세다. 스마트폰, SNS를 통한 유행 확산 속도를 고려하면 향후 변화 속도도 한국을 따라오기 힘들 듯하다. 그렇다고 일본 시장에서 더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명품 브랜드 이세이 미야케와 꼼데가르송, 실용성을 강조한 유니클로와 무인양품, 빌 게이츠가 애호하는 헬로키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적인 히트상품을 배출시킨 저력을 무시할 수 없다.

한국 소비시장에서도 저렴한 가격대에 충분히 만족스러운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고급 시장이나 저가 시장이나 해외업체에 대적할만한 한국 브랜드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유행에 따라 유명 브랜드나 상품, 스타일을 재빨리 들여오는 식이다보니 100년 전통의 가게를 찾기도 어렵다. 성숙기 시장에서는 속도와 기술에만 의존하기보다 독창성, 감성을 추구해야 고객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소득 3만 달러를 단순히 잘 먹고 잘 사는 기준으로 보기보다 잘 발달된 소비시장을 기반으로 글로벌 히트상품을 부화시키는 계기로 인식해야 한다. 성장 잠재력이 큰 싱글, 중년 시장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같은 길을 먼저 지나간 자의 시행착오를 살펴보는 학습도 필요하다. 로봇 강아지와 교감하는 모습이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여러 측면에서 일본 소비시장은 필독 교과서는 아니더라도 핵심 참고서 역할은 충분히 할 것이다.

최순화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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