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반 만에 사라진 '유령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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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현대상선이 2000년 6월 산업은행에서 대출받은 4천억원 중 북한에 보낸 2천2백35억원을 배를 산 것처럼 회계 처리한 사실이 19일 드러남에 따라 현대 측의 회계장부 허위 기재 의혹이 수면에 떠오르게 됐다.

현대측은 지난해 하반기 산업은행 대출금의 대북 송금 의혹이 처음 불거졌을 때 "4천억원 대부분을 회사 운영자금으로 썼다"며 북한에 돈보낸 사실 자체를 부인했었다. 이 때문에 어떠한 형태로든 현대상선이 회계 장부에 이 돈의 명목을 허위 기재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동안 "현대상선이 공기구 비품 값을 부풀렸다"는 등 각종 의혹이 언론에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감사보고서에서 선박 구입 명목으로 회계 처리했음이 확인됨에 따라 그 의혹은 풀리게 됐다.

금융감독원에 제출된 최근 3년간의 현대상선 관련 감사보고서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현대상선은 2000년 북한에 보낸 2천2백35억원을 2천1백71억원짜리 배를 사고 각종 수수료 64억원을 지불한 것으로 회계 처리했다. 2001년에도 그 배를 그대로 갖고 있는 것처럼 기록했다. 배의 수명이 줄어드는 데 따른 감가상각 비용도 1백30억원 반영했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 국회 국정감사를 통해 대북 송금의혹이 폭로되고 이어진 감사원 감사를 통해 북한에 돈을 보낸 사실이 드러났다.

이후 올해 금감원에 제출된 감사보고서에서야 현대상선은 처음으로 이 돈에 대한 회계 처리 내용을 '실토'한 것이다.

현대측은 2001년 2천여억원 가치의 선박을 보유한 것으로 기재한 부분을 이번 보고서에서 '사업권'을 가진 것으로 바꿨다.

그러면서 이 돈이 모두 지난해에 손실된 것으로 처리했다. 북한에 보낸 2천2백35억원을 약 1년반 만에 모두 손실한 것으로 회계 장부에 기록한 것이다.

금감원 고위관계자는 "지난해 현대상선에 대한 특별감리 당시엔 감사보고서에 이같은 사실이 전혀 나와 있지 않아 알 수가 없었다"면서 "이번 보고서에 처음으로 관련 사실을 포함시킨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허위 기재 보고서를 관련 당국에 제출했을 경우 증권거래법상 허위 공시로 처벌이 가능하며 이를 대출 관련 증빙으로 사용했을 경우 사기죄도 성립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수익성 없는 투자로 1년반 만에 2천2백35억원을 모두 손실한 점에 대해선 배임죄 적용이 검토될 수도 있다.

따라서 현대상선이 고의로 회계 장부를 조작했음이 특검 조사로 최종 확인되면 관련자들은 사법처리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전진배.이수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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