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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 소재 영상물 규제" 말나오자 후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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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학교폭력 근절이 우선인가, 표현의 자유가 더 소중한가. 혹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면 학교폭력은 근절되는가. 14일 각종 사이트에서 네티즌들이 뜨거운 논전을 벌였다. 발단은 이날 열린우리당과 교육인적자원부가 함께 자리한 교육정책 당정회의였다. 김진표 교육부총리도 참석했다. 회의 뒤 당정은 학교폭력 근절 대책의 하나로 영화.만화 등 폭력 영상물에 대한 법적 규제 방침을 내놓았다.

열린우리당 지병문 제6정조위원장은 "'친구' 같은 영화를 수백만 명의 학생이 관람하고 영화 속 폭력이 미화되면서 다시 범죄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창작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법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방안이 있는지 적극 검토하겠다"고 했다. 그는 또 "영화나 만화, 인터넷에서 유포되는 정보가 학교폭력 예방과 갈등 관계에 있는 부분이 있다면 관계 법령을 개정해서라도 종합 대책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방침이 알려지자 인터넷에서는 네티즌을 중심으로 찬반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찬성하는 쪽은 이렇게 해서라도 학교폭력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반대하는 쪽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엉뚱한 대책이라고 했다.

한 네티즌(khksdg )은 "온 나라가 폭력에 휩싸였다. 폭력영화 자체를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집단으로 패싸움하는 등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금해야 한다. 폭력을 동경하게 만드는 것은 표현의 자유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mdragon8) 는 의견도 있었다.

반면 "허울 좋은 청소년 보호를 내세워 창작의 자유를 말살하겠다는 것으로, 악법으로 변질될 소지가 크다"(keiman) 또는 "탁상행정이 만들어 내는 규제 공해"(andy2507)라는 반대론도 만만치 않았다.

논란은 영화인에게까지 번졌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 김형준 회장은 "학교폭력은 학교 교육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할 일인데도 매번 영화에만 책임이 돌아온다"며 "청소년에게 끼칠 영향을 고려해 나이별 등급제를 실시하고 있다"고 했다.

영화를 제작하는 심재명 MK픽처스 사장은 "영화 만드는 사람도 표현의 수위나 내용에 대한 자정 능력이 있는데 외부에서 별도로 제재하겠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조치"라고 비판했다.

◆ 왜 이런 대책 나왔나=10일 충북 충주 지역 고교생 1707명은 학교 폭력조직인 일진회의 처벌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청주지검 충주지청에 냈다. 한 달 전 또래에게 집단폭행 당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충주 모 여고 이모(17)양 사건이 발단이었다.

이 사건이 사회문제로 번지자 열린우리당은 교육부 측에 긴급 당정회의를 요구했고, 이날 폭력영화 규제 대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열린우리당 한 관계자는 "이런저런 논의가 오가던 중 교육부 쪽에서 먼저 폭력영화 규제대책을 들고 나왔다"면서 "당도 여기에 동의했다"고 설명했다.

◆ 법안까지 만들어질까=법안의 현실화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헌법재판소 연구원 출신인 전학선(광운대 법대) 교수는 "표현의 자유가 가장 많이 보장되는 프랑스에서조차 폭력물 노출은 청소년에게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다"고 긍정론을 폈다.

그러나 헌재 연구관 출신인 황도수 변호사는 "학교폭력을 유발할 수 있는 폭력물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영화 제작을 포괄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면서 위헌소지가 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황 변호사는 "영화 '친구'나 '말죽거리 잔혹사' 등의 폭력 장면은 명백하고 현저한 위험이 있는 폭력물로 보기 어려워 정부가 일일이 나설 일이 못된다"고 했다.

파문이 커지자 지병문 위원장은 오후 다시 기자회견을 열어 "폭력적인 영화를 법을 동원해 막겠다는 것이 아니다. 교육부와 영화계 인사, 청소년위원회 등과 긴밀히 논의해 대책을 만들겠다는 취지"라고 한발 물러섰다.

전진배.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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