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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아시베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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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본 낚시꾼들에게 '300억 엔 포인트'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동해에 면한 후쿠이(福井) 신항 방파제가 그곳이다. '지역 균형개발'을 위해 일본 정부는 3000억원을 쏟아부어 수심 10m의 방파제를 쌓았다. 당초 기대한 석유화학 콤비나트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한적한 해안가에 대형 공장이 들어올 리 만무했다. 방파제를 오가는 1만t 이상의 배는 일 년에 고작 10척. 조용하고 수심 깊은 방파제는 월척을 노리는 낚시터로 둔갑했다.

한번 결정하면 좀처럼 철회하지 않는 게 관료의 습성이다. 그럴듯한 명분만 있으면 그만이다. 일본 가고시마현의 그림 같은 이카라(伊唐)대교. '낙도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인다'며 1000억원을 들여 아름다운 다리를 놓았다. 섬 주민이 100가구밖에 안 된다는 사실은 대수롭지 않다. 다리를 이용하는 차량이 하루 50여 대라는 경제성은 따질 필요가 없다. "섬 주민도 사람이다"는 명분이 중요했다. 결국 다리 예산은 건설업자 배만 불렸다.

그렇다고 함부로 눈먼 돈에 손댔다간 거덜나는 게 일본이다. 홋카이도의 아시베쓰(芦別) 마을은 밤마다 젊은 청년들이 골목을 돌아다니며 불침번을 선다. 이웃들의 야반도주를 막기 위한 별동대다. 거품경제 시절 이 마을은 정부 예산과 은행 융자를 끌어들여 테마파크 '캐나디안 월드'를 지었다가 깡통을 찼다. 가구당 빚은 8000만원이 넘었다. "빚에 못 이겨 몰래 달아나면 남아 있는 사람들의 빚이 그만큼 늘어납니다." 눈에 불을 켜고 야경을 서는 이유다.

예산의 계절이 돌아왔다. 국회 상임위마다 예산안을 통과시키는 방망이 소리가 요란하다. 4년간 976억원의 시설투자에다 시스템 유지비용만 41억원인 농어촌 정보화 사업. 월 매출이 1억116만원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에도 행정자치부는 염치없이 우긴다. "지역 간 정보격차 해소와 농어촌 공동체 활성화"라는 명분부터 들이댄다.

어디 이뿐이랴. 국방개혁 289조원, 행정도시에 45조원, 국가균형발전에 115조원, 대북 지원 6조원, 쌀시장 개방 비용 112조원…. 머지않아 호남고속철 건설비 15조원도 얹어질 판이다. 어느 것 하나 명분에서 꿀릴 게 없다. 문제는 감당하기 힘든 돈이다. 아시베쓰 마을이 남의 일이 아니다. 혹시 외국으로 도망치는 이웃이 없나 영종도 국제공항에서 불침번만 서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