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당들 '가운데로 … 가운데로'] '교육 3불' 진단 달라도 대책 닮은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서현진 성신여대 교수

37개 이슈에 대한 각 정당의 기본 입장을 비교해 보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차이는 법인세 인하, 사형제 폐지, 대체복무제, 국가보안법, 대북경제 지원과 핵문제, 주적 개념 등 6개 항목에서만 뚜렷이 나타난다. 이는 여야 입장차이가 주로 대북 인식과 대처방안에 근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경제.민생.교육.사회복지.여성 등 21개 항목에서 여야의 이념 차이가 별로 없었다. 정쟁은 있지만 정책 차이는 거의 없는 한국 정당정치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책적 차이는 없는데 정당 간 경쟁이 심하면 국민 실생활과 직결된 문제들을 생산적으로 토론하는 데 장애가 된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최근 국회에서 부동산 대책이나 교육인적자원부의 3불(不)정책(고교평준화 불가, 기여입학제 반대, 본고사 반대) 등 여러 현안에서 격렬한 대립 양상을 보였지만 정작 공식 입장에선 비슷한 이념 스펙트럼을 보였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공식 입장이 비슷하더라도 각 정당의 내부 논리는 다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고교평준화 유지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고교의 서열화, 학벌주의, 입시위주 사교육 심화 등 교육 파행을 막는 정책이란 이유로 찬성한다. 반면 한나라당은 조건부 찬성 입장을 밝히면서도 상향 평준화와 자율형 사립.공립학교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하향 평준화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립형 고교 확대를 요구한 자민련의 고교평준화 반대 입장과 실질적으로 유사하다.

또한 대학 기여입학제 도입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국민계층 간 위화감 증대와 교육기회 균등에 배치한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한편 조건부 반대인 한나라당은 기여입학제는 반대하지만, 대학 경쟁력 강화와 사학의 재정확충방안으로 기여우대제를 조심스럽게 공론화할 때라고 주장한다.

대학본고사도 두 정당 모두 조건부 반대를 택했지만 시각차가 있다. 열린우리당은 본고사가 고교교육 정상화 이후에나 장기적으로 검토할 문제이며 대학의 학생선발권도 아직 합리적 기준이 마련돼 있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본고사 도입 여건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정부가 단계적 조치를 밟아나가면 머지않은 장래에 대입 자율화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같은 한나라당의 입장은 민주당(조건부 찬성).자민련(찬성)과 별반 다르지 않다.

노동자의 경영참여 확대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기업 투명성 제고, 생산성 향상, 기업의 민주적 운영을 통한 산업 민주주의 확대에 기여한다는 이유에서 찬성한다. 한나라당도 조건부 찬성이긴 하지만 인사.경영권의 직접적인 참여보다는 성과에 대한 이익이나 우리 사주제, 노사협의회 등 결정과정의 참여가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정당 간 입장차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대외적 입장 표명에선 차이가 반영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일까. 현대 정당의 속성상 선거에서 승리연합을 구축하기 위해 중도로 수렴되는 것은 세계적으로 보편적 현상이다.

즉, 보수와 진보 간 이념 갈등이 심각한 문제에 정당들은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선거에 대비한 공식정책 발표에선 중도 쪽으로 기운다. 따라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사회적 이념 대립이 첨예한 이슈에 대해 내심 다른 입장이면서도 외형적으로 비슷한 입장을 보이는 것은 표를 염두에 둔 전략적 행위로 보인다. 하지만 대표적 선거 중도정당인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도 실업, 낙태, 총기 규제, 환경, 복지, 소수자 정책, 교육정책 등에서 분명한 정책적 차별성을 갖고 있다. 우리의 정당이 좌우균열에 따라 양극화될 필요는 없지만 다양한 국민의 요구와 사회적 쟁점을 정책결정 과정에 반영하기 위해선 대북.안보 문제뿐만 아니라 국민 실생활 분야에서 정책적 차이를 뚜렷이 할 필요가 있다.

서현진 성신여대 교수

정당 이념 성향 기획취재팀

▶참여 교수 = 숭실대 정외과 강원택 교수, 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과 임성학 교수, 성신여대 사회교육과 서현진 교수
▶취재기자 = 전영기 차장, 박소영.김정하 기자

37개 주요 정책 입법화하려면 …
대연정 안 해도 63%는 통과 가능

임성학 서울시립대 교수

정당의 공식 입장을 분석해 37개 주요 정책의 입법화 가능성을 따져봤다. 먼저 입법 가능성을 살펴보기 위해 의석 분포를 파악해야 한다. 10.26 재선거 이후 의석 분포는 현재 열린우리당 144석, 한나라당 127석, 민주당 11석, 민주노동당 9석이다. 최근 가칭 국민중심당과 자민련이 통합을 공식적으로 선언했기 때문에 이번 조사에서는 자민련을 6석(자민련 3석과 국민중심당 3석)으로 가정하고 분석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했던 대연정의 경우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의석 수가 277석으로 총의석 수의 90.6%을 차지한다. 따라서 두 거대 정당이 합의만 하면 모든 법안이 통과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연정이 없더라도 주요 정책 중 두 정당의 의견이 일치한 8개 정책은 바로 입법화할 수 있고, 이는 중앙선관위가 제시한 37개 정책의 22.9%를 차지한다. 또 두 정당이 정책에 대한 기본 방향은 같지만 한쪽 정당이 조건부로 수용하는 경우가 40.0%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의견이 일치하거나 양당이 서로 조금만 양보하면 통과할 수 있는 주요 정책이 22개 정책으로 62.9%였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국정운영의 해결책으로 제시된 대연정보다 여야의 양보와 타협 노력이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입장 차이가 별로 없는 정책들의 입법화가 미뤄지고 있다는 사실은 결국 거대 정당들의 무책임이나 정쟁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과의 정책연대 외에 열린우리당과 소수정당의 정책연대와 입법 가능성을 살펴보면 세 가지 사례가 나올 수 있다. 먼저 열린우리당.민주당.민노당이 손을 잡는 소연정 I형이다. 둘째,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연대하는 II형이다. 마지막으로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이 결합하는 III형이다. 소연정 I의 경우 세 정당의 이념적, 지지기반의 차이 때문에 II형.III형보다 효과적인 정책연대를 하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I형의 경우 정책의 일치 혹은 부분적 일치가 37개 정책 중 54%에 불과하지만 II형은 70.2%, III형은 67.5%에 달하기 때문이다. 소연정 II형(열린우리당+민주당)과 III형(열린우리당+민노당)을 비교해 보면 II형은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정책이 전반적으로 방향은 일치하지만 입장의 강도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III형은 의견의 방향과 강도가 완전히 일치하는 정책 수가 16개나 된다. 다시 말해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이 별도의 정책 협의를 하지 않더라도 곧바로 입법화할 수 있는 정책의 비율이 37개 정책 중 43.2%나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책만 놓고 봤을 때 열린우리당은 이념적 성향이 비슷한 민노당과의 소연정이 가장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의 지지층 확대를 위해선 민주당과의 소연정이 더 바람직하며 그렇게 하려면 이념적 태도를 보다 유연하게 가져갈 필요가 있다.

이와 거꾸로 야당이 연합해 특정 정책을 통과시킬 수 있을까. 이 경우 한나라당.민주당.민노당.자민련이 모두 합쳐야 150석을 넘길 수 있다. 이념적.지역적 기반이 다른 네 정당이 정책연대를 하기는 상당히 어렵다고 봐야 한다. 다만 '대통령 사면권 제한'에 대해선 열린우리당만 반대하고 야 4당은 모두 찬성하는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어 향후 국회 논의 과정이 주목된다. 하지만 이 항목 말고는 야당끼리 의견이 같은 항목에 여당도 동조하고 있어 야당 연합이 별 의미가 없다.

임성학 서울시립대 교수

인간 배아복제.이중국적 등
기존 이념 잣대로 구분 어려워

이번 조사에는 보수와 진보로 딱 잘라 구분하기 어려운 항목이 13개 포함돼 있다. 예를 들어 '이중국적 허용'은 헌법상 개인의 국적 선택 자유가 인정되므로 국가의 규제와 권위를 최소화한다는 측면에서 진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질서를 대변하는 세계화 추세나 기득권층의 병역.납세의무 회피를 막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중국적 허용은 보수가 된다. 즉 진보나 보수 모두 이중국적 허용을 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세계화 시대에 맞게 이중국적을 허용해야 한다는 보수적 입장에서, 열린우리당은 헌법상 국적권도 기본권이라는 진보적 입장에서 똑같이 조건부 찬성 입장을 표시했다.

마찬가지로 '스크린쿼터제'도 전통적 보수-진보 구분이 힘든 주제다. 현재 모든 정당은 한국 영화 발전과 미국 등 강대국의 영화산업 독점에 대응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호 장치로 스크린쿼터제 유지를 주장하고 있다. 국익적 관점의 보수주의적 시각이다.

인간 배아복제 이슈도 국가경쟁력과 산업 발전을 중시하는 시장주의적 보수주의 진영은 찬성할 것이지만 반대로 종교적 보수진영에선 생명윤리를 이유로 반대할 수 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이 문제에 반대하는 이유는 주로 선거와 직결되는 종교계의 여론을 중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은 매우 중요한 21세기형 이슈이지만 '세계화/반세계화' '국가경쟁력/인권보호' 등 새로운 척도를 요구하고 있어 전통 보수와 진보의 이념으로 구분되기는 어렵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