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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랏차차 '88세 청년'] 16. 체육회 조직 정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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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1968년 8월 태릉선수촌에서 열린 사회체육 지도자 강습회.

대한체육회장을 맡은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국회의원으로서 의사 일정을 마치고 체육회관으로 출근해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던 나는 우연히 사무국 직원들의 대화를 듣게 됐다.

"카우보이 신세니 별 수 있나." "하숙집에 불났으면 내 짐부터 챙기고 봐야지." 나는 금세 말뜻을 알아차렸다. 카우보이란 허리에 총 대신 '불안감'을 차고 다니는 자신들 신세를 빗댄 말이다. 체육회를 잠시 들렀다 가는 곳으로 여기는 직원들에게서 무슨 사명감을 기대할 것인가.

회장이 바뀌면 일자리가 바뀌거나 일터를 떠나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 직원들이 소신껏 일하기 어려웠다. 각종 서류와 자료가 제대로 정리.분류.보관돼 있을 리 만무했다. 자료가 필요할 때마다 관련자들을 찾아 그들의 기억에 매달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체육회 직원들의 열정과 책임감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체육회가 먼저 그들의 '집'이 되어야 했다.

고심 끝에 이성구.김종열.김의형.박상만.이용일 씨 등 다섯 명으로 구성된 기구개편심의위원회를 만들었다. 이들로 하여금 조직을 정비하고 인사.재무.서류 취급 등 사무관리에 대한 규정과 체육회관 건립추진위원회 규정을 만들도록 했다. 이것이 대한체육회 최초의 사무규정이다. 이 규정으로 인해 직원들의 신분 보장이 이뤄졌다. 회장이 바뀔 때마다 이뤄지던 정치성 인사는 불가능해졌다. 회장이 바뀐다고 행정에 공백이 생기거나 인사 회오리가 몰아치는 일은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됐다.

선수 관리와 지원을 위한 규정과 제도도 정비했다. 유한철씨를 위원장으로 하는 체력관리위원회를 발족시켜 국가대표 선수들의 대사량을 측정하게 했다. 그럼으로써 개인경기 종목별 에너지 소모량에 대한 자료를 갖게 됐다. 하루 운동 시간을 세 시간으로 했을 때 선수 한 명당 4800칼로리, 레슬링.역도 등의 중량급 선수일 경우 5200칼로리까지 공급하기 위해 체육회에 최초로 영양사를 고용했다. 나로서는 이 일이 우리 체육의 과학화를 위한 첫 조치였다.

겨울철을 이용한 코치강습회를 구상하고 선수 훈련단의 기구도 뜯어고쳤다. 김윤기씨를 단장으로 임명하고 4단계로 나눈 합숙훈련 계획을 수립했다. 선수들의 훈련 성과를 종합적으로 분석 평가하기 위해 중앙심의위원회를 두었다. 위원장에 당시 국회의원이자 경남체육회장을 맡고 있던 김택수씨, 부위원장에 이성구씨, 그리고 아홉 명의 위원을 위촉했다. 김택수씨는 나중에 내 후임으로 대한체육회장이 된다.

이 무렵 국가대표 선수들의 합숙소는 서울 동숭동에 있었다. 합숙소 규모와 시설도 형편없었지만 더 큰 문제는 이동 문제였다. 선수들은 매일 시 외곽에 있는 훈련장을 시내버스로 오갔다. 가끔 군 차량도 이용했지만 근본적으로 해결될 기미가 없었다. 궁리 끝에 체육회가 보유한 유일한 차량을 팔기로 했다. 회장 전용 승용차였다. "출장이 잦은데 승용차가 없으면 어쩌느냐"며 말리는 분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메달은 회장이 아니라 선수가 딴다"며 고집을 부렸다. 승용차를 팔아 선수단 전용 버스 한 대를 마련했다.

1964년 2월 29일, 종래의 훈련단 행정반을 폐지하고 단일 행정 체제의 사무처 기구와 인사를 공포할 수 있었다. 면면은 이렇다. 사무처장 주영광, 총무과장 김규태, 체력관리과장 이창환, 공보과장 신상우, 기획계장 금순복, 지도계장 김용모, 훈련계장 박귀룡. 이로써 도쿄올림픽을 향한 전열이 갖춰졌다. 새로운 의욕이 내 가슴 한 복판에서 불타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총진군의 나팔을 부는 듯한 심정이었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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