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올릴 땐 후딱, 내릴 땐 미적? 기름값에 낀 오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3면

‘올릴 땐 LTE, 내릴 땐 2G급 속도’

 기름값을 바라보는 소비자들의 불만이다. 원유가가 내릴 때에는 휘발유나 경유 같은 석유제품 값이 제대로 내리지 않고, 원유가가 반등할 때면 오르기가 무섭게 제품 값도 잽싸게 오른다는 것이다. 반면 정유업체들과 주유소 업계에서는 “제품 값을 충분히 올리지 못하고 있다”고 항변한다. 누구 말이 맞을까.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우선 소비자들이 느끼는 불만에도 일리가 있다. 최근 휘발유를 L당 1200원대에 판매하는 주유소가 자취를 감췄다. 22일 유가정보시스템인 오피넷에 따르면 전국에서 가장 저렴한 주유소는 경북 김천의 삼립식품김천주유소로 휘발유 1L당 1319원에 판매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1200원대 주유소는 지난달 11일 충북 음성에 처음 등장한 뒤 이달 2일 전국 134곳에 달했었다. 불과 20일 만에 종적을 감춘 것이다. 이날 서울 지역의 휘발유 가격은 L당 1556.55원(전국 평균은 1462.93원)으로 4일(L당 1489.52원) 이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값이 올랐다.

 정유업계도 할 말이 많다. 오피넷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제품 가격이 공개되고 있는 마당에 기름값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유가를 바라보는 ‘기준 차’에서 기인한다. 소비자와 정부가 유가를 얘기할 때 흔히 인용하는 지표는 두바이유나 서부텍사스중질유(WTI) 같은 원유가의 변동 추이가 그 기준이다. 원유가가 배럴 당 50달러에서 40달러로 20%내렸으니, 휘발유 값 역시 20%가량 내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석유 제품 가격은 유류 도매시장 격인 싱가포르 석유현물시장의 거래가를 기준으로 결정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싱가포르 시장에서 거래되는 제품가격은 생산원가와 운송비 같은 고정비를 포함한 것이어서 순수 재료비를 뜻하는 원유가처럼 드라마틱하게 꺾이거나 급등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원유가가 바뀌는 만큼 제품가격이 변동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실제로 오피넷에 따르면 지난해 6월 23일 L당 713.34원에 거래되던 두바이유가 지난 16일 406.44원으로 43%나 떨어지는 사이, 싱가포르 석유현물시장에서 거래된 휘발유 값은 L당 37%가 떨어지는데 그쳤다. 같은 기간 경유 시세 역시 L당 34%만 내렸다.

 대신 동아시아 역내의 석유제품 수급 상황이 싱가포르 시장의 시세에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 시장에서 경유는 보통 동절기에 값이 세진다. 일본에선 경유로 난방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반면, 나들이 수요가 많아지는 하절기에는 휘발유 값이 원유값보다 더 많이 오르는 게 일반적이다

 국제 원유가가 석유제품 가격보다 더 많이 출렁이는 이유는 또 있다. 원유 시장은 대규모 투기자본이 등장하는 선물시장의 성격을 그대로 띤다. 투기자본의 움직임에 따라 가격 변화가 심하다는 얘기다. 반면 싱가포르 현물시장은 실수요자 중심으로 거래가 이뤄져 원유만큼 가격 탄력도가 크지 않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최근 보고서를 통해 "(단기간에)국제유가가 떨어진 정도와 최근 들어 대폭 확대된 일간 유가 변동폭을 보면 석유는 금융자산과 유사해졌다”며 “다른 금융자산과 마찬가지로 유가흐름이 선물시장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정액세와 정률세가 보태져 있는 우리나라 유류세 관련 세수체계도 유가에 대한 공급자와 소비자간 인식 차이를 부채질한다. 제품 값에 붙는 부가가치세(10%)만 봐도 그렇다. 부가가치세의 경우 휘발유가가 1200원 일 때는 120원이 붙지만 1500원이면 150원이 붙게 돼 그만큼 체감 인상폭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 이달 초(7~13일) 국내 휘발유 평균 소비자가는 L당 1416.7원이었고, 이 중 세금은 874.7원에 달했다.

이수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