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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배우고 짐은 가볍게 '작은 소유'의 시대 생각해야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강일구

사회복지가 커다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쟁점은 복지 비용을 어떻게 마련하는가 하는 것이다. 시비의 대상이 됐던 일의 하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증세 없는 복지”를 말한 일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은 복지에 비용이 따르되 그것을 최소한으로 하겠다는 방안을 간략하게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금 제도를 정비하고 그 허점을 찾아 세금의 총액을 늘려 복지비용에 충당하겠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아니다. 다만 그것으로써 참으로 실속 있는 복지가 가능하겠느냐 하는 의문이 나온다. 그리고 누진세나 법인세 등의 대폭 강화 등을 포함한 조세제도의 대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중요한 사실은, 정당이나 정치 이념 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복지제도의 필요에 대해 합의가 있다는 것이다. 의견의 차이가 격렬한 논쟁과 대결이 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정치 논쟁의 관행이지만, 이러한 합의-합의를 인정하지 않는 합의가 생겨난 것은 그 필요의 절실성이 전달된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가 극단적인 생존 투쟁의 상황을 벗어난 지점에 이른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조금 더 합리성이 확립된 상태에서는, 이러한 합의는 세부 사항의 조정으로 일정한 타협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불평등이 자본주의 위태롭게 해
이 문제를 생각하는 데 있어 하나의 계기가 되는 것은 한국이 복지 면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최하위에 들어가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지표는 국가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수치감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하고 있는 바 인간적 고통에 대한 대책을 우리가 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하여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를 향해 우리가 나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한다. 지난 연말 네이버의 ‘열린 논단’에 고려대 고세훈 교수의 ‘평등과 복지’라는 제목의 강연이 있었다. 고 교수가 인용하는 통계에 의하면, 한국은 빈부의 격차를 재는 지니 계수가 0.415 (2011년 수치)로 OECD 34 개 국가 중 아래로부터 다섯째의 자리에 놓인다. 이 열악한 상황은 정부의 사회적 지출에 의해 시정될 수도 있는 것인데, 한국의 사회적 지출은 국내총생산(GDP)에 비교해 OECD 국가들의 평균 지출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숫자들은 조금 전에 말한 바와 같이 국가의 국제적 위상, 그리고 우리 사회 현실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사회 전체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복지와 평등의 문제를 철저하게 다각도에서 검토하고 있는 고 교수의 글이 그 서두에서 여러 이론가의 견해를 인용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불평등이 민주주의는 물론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의 시정은 체제의 안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인 것이다.

긴축이냐, 재정 지출 확대냐 논란
복지 지출에 반대하는 입장은 그것이 경제 활성화를 지연할 수 있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독일이 주도해 유럽연합(EU)은 경제 회복 방안으로 그리스를 비롯해 공사 부채 문제가 큰 남유럽의 여러 나라에 긴축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진보주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나 조셉 스티글리츠는 금융위기 사태 이후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대책은 긴축이 아니라 정부에 의한 재정 지출이라고 주장해 왔다. 담보에 시달리는 주택 보유자, 사회기반시설, 사회안전망 등을 위해 재정 지출을 늘린다면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드시 정부 지출 확대만을 정책으로 내세우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 1월 그리스 정권을 장악한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의 시리자(급진좌파연합) 정책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케인스의 경제 사상에서 유래하는 이러한 제안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이 돌아가면, 결국 그것은 소비를 늘게 하고 소비가 투자를 자극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고 교수는 강연에서 “가난한 사람은 돈을 쓴다”는 말을 농담처럼 내놓고 있다.

경제학자들이 제안하는 지출과 소비 확대 정책은 일단 보통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경제는 분명한 예측을 허용하지 않는 분야다. 서로 다른 정책적 처방이 나오는 것도 반드시 서로 다른 계급적 이익이 작용하는 때문만이 아니라 경제학이 아직은 정밀과학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와 같은 국외자가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옳을 수는 없다. 다만 오늘날 경제는 모든 사람의 삶의 근본이 돼 있기 때문에 국외자도 어떤 느낌을 가질 수는 있고 국외로부터의 견해나 질문이 등한시됐던 측면의 문제를 새로 생각하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도덕의식이 질서 유지의 축 될 수도
고 교수의 강연이 끝난 다음 필자는, 무례를 무릅쓰고, 청중의 질문에 참여했다. 질문은, 어찌하여 경제는 소비의 증대를 중요시하는가, 상식적인 관점에서는 소비의 생활이 아니라 근검절약하는 생활이 삶의 덕목을 지키는 삶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또 경제의 관점에서 표현되는 저출산과 인구 감소에 대한 우려는 참으로 옳은 것인가도 물었다. 몇 년 전에 작고한 노르웨이의 환경 철학자 아르네 네스는 오늘의 세계 인구가 그 10분의 1 정도로 주는 것이 환경 친화적인 삶을 확보하는 길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질문은 그것을 마음에 두고 한 것이었다.

질문에 대한 답의 일부는 강연 원고에 나와 있다. 소비라고 하면 쉽게 연상하게 되는 것은 과잉 소비 또는 과시 소비와 같은 것 또는 적어도 낭비로 간주할 수 있는 물자의 소비이다. 그러나 실제 고 교수가 말하고 있는 소비는 사람들의 삶의 필요를 충당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삶의 필요란 생존을 넘어 교육·의료, 실직자나 노년의 사회 보장 등에 관계되는 필요를 포함한다.

다른 경제학자의 경우에도 그러하지만, 소비생활의 활성화를 말하는 데에는 경제의 움직임에 대한 과학적 이론 이외에 도덕적 관심이 들어 있다. 이론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사실관계에 못지않게 이론가의 도덕적 지향이다. 고 교수가 한국의 경제 상황에 있어서의 불평등을 논하면서, 세계적으로 높은 한국의 자살률·이혼율·저출산율·교통사고 사망률 등을 거론하는 것도 인간적인 삶의 조건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이 항목들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부정적 1위와 관련해, 그 배경으로 취약한 공동체적 유대감을 언급하는 것도 그것을 말한다. 경제적 불평등이 핵심 문제라고 하면, 이것을 시정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법적인 조처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게 되는 관료체제의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공직을 맡는 사람에게는 사회적·도덕적 질서를 지키려는 본능적인 도덕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이 여기에 전제된다. 그리하여 그러한 공적 도덕의식이 시장경제와의 길항 속에서 인간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하나의 축이 될 수 있다고 고 교수는 생각한다.

그러한 균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제 질서가 참으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의 질서가 될 수 있을까. 고 교수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윤리 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교수의 저서 덕의 상실의 한 주제가 경제적 효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윤리적 담론의 소멸이라는 것을 전한다. 매킨타이어 교수의 생각은 상당히 비관적이라고 하겠지만, 이에 대해 고 교수는 낙관적 비전을 갖는 것이 현실적 필요라고 말한다. 비관해 봐야 그것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비관도 현실 진단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의미 있는 직업’ 갖는 것이 가능한가
최근 미국의 한 인터넷 매체에는 우리나라에도 다녀간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의 회견기가 나와 있었다. 오늘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오늘의 문제로서 경제 성장도 이야기하지만, 그는 이에 더해 환경 문제 그리고 경제 문제 속에서 완전히 잊힌 인간 소외의 문제도 거론한다. 소외와 관련해 그는 사람들이 직업을 갖는 게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 ‘의미 있는 직업’을 갖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마르크스는 공장 노동에서의 인간 소외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하비 교수는 그전에는 철강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그래도 그들의 노동에서 위엄과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서비스업의 직장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그러한 직업들이 철저하게 상업화된 그리고 그에 따른 인간 부재의 관료적 조직의 한 부분이 된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업의 많은 부분이 추상화된 때문이다. 많은 일이 인공지능·로봇으로 대표하는 기술 변화로 인해, 물질의 실체성이 없는 작업이 된 것이다. 관료화되고 상업화된 일에는 지식과 문화의 작업도 포함된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도 두루 확인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만큼 지식과 문화가 양적으로 측정되는 생산품으로 또는 상업적·대중적 인기 품목으로 간주되는 곳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교육이 스펙 쌓기가 된 것도 그렇다. 얼마 전 젊은이가 골프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 사회적 진출에 도움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골프와 같은 스포츠마저도 그 자체로 즐기는 일이 될 수 없게 된 것이다.

토지와 공동체까지도 상품화
하비 교수는 지식이나 교육도 그러하지만, 토지와 공동체까지도 상품이 돼버린 것이 오늘날이라고 말한다. 생활의 환경으로 원시적 자연을 선호했던 미국의 시인 게리 스나이더는 “숲은 수확물이 되고/ 자연은 놀이터가 되고/ 대중은 돈이 되는 것/ 그것이 장사하는 사람의 자연관”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세계에서 지구적 삶-“지구의 살림 (Earth Household)”을 찾는 것은 허구의 순환 속을 맴도는 일이 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낙관적으로 그의 자손들을 향해 “통계 숫자의 산이 한없이 높아 가고” 사람의 삶은 아래로 처지는 것이 오늘날이지만, 때가 되면, 다시 풀이 자라는 들녘이 나타날 것이고, 거기에서 만나자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주는 교훈으로, “늘 함께하며,/ 꽃을 배우고/ 짐을 가볍게 하라”는 시구를 남기고자 한다.

경제와 사회가 한 번에 이러한 자족적 유대와 자연과 작은 소유로 되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것에 대한 생각을 잊지 않는 것은 중요한 일일 것이다. “짐을 가볍게 하라.” 검소한 삶은 소비를 줄이는 경제적 절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하는 물질을 제한해 그 진실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성장의 경제학, 평등의 경제학의 논의를 듣고 있다 보면 그에 더해 ‘지구살림’의 경제학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