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으랏차차 '88세 청년'] 14. 대한체육회장 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1966년 대한체육회장이던 필자가 체육회 정기 대의원총회를 주재하고 있다.

1964년 1월 20일 저녁, 다섯 명의 신사가 나를 찾아왔다. 대한체육회 임시 대의원총회에서 전형위원으로 뽑힌 오광섭.이경구.이종갑.이종구.류태영씨였다. 그들은 내게 대한체육회장직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대한체육회장직은 나라의 체육 발전을 이끌어야 할 자리였다. 나는 민족 지도자에 버금가는 인물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대 체육회장의 면면이 그것을 증명했다. 광복 후 체육회장을 맡은 분만 보아도 제11대 회장 여운형, 14대 신익희, 16대 조병옥, 17대 이기붕 등 당대의 지도자들이었다.

"뜻은 감사합니다만 아직 역량이 부족하고 역대 회장님들을 도저히 따를 수 없어 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방문자들은 집요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만한 역량을 갖춘 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청하는 겁니다. 반드시 맡으셔야 합니다."

오랜 시간 같은 말이 오갔다. 그러나 그들이 방문할 때부터 나는 체육회장직이 '피할 수 없는 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찾아오기 전부터 체육회장 후보로 내 이름이 오르내렸다. 결정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언질이 있었다. 여기에는 민주공화당 내부의 정치적인 알력도 작용했다. 당시를 회상하며, 나는 생각해 본다. 어떤 '운명의 힘'이 나를 체육계로 이끈 것은 아닐까 하고.

63년 말 내가 민주공화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박 대통령은 나를 원내총무로 내정했다. 김종필 당의장의 귀띔으로 알게 됐다. 정치자금 60만원도 줬다. 그때 60만원이면 엄청난 액수였다.

대통령의 신임에 감사하면서, 원내총무로서 어떻게 국정을 펼쳐나갈 것인지 구상에 구상을 거듭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민회관에서 결혼식 주례를 서고 있었다. 김종필 당의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청구동에서 보자"는 것이었다. 주례를 마치고 청구동 김 의장 집으로 달려갔다. 김 의장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민 의원, 미안하게 됐습니다. 김용태 의원이 너무 심하게 반발하는 바람에 원내총무직을 드릴 수가 없게 됐습니다. 대신 원내부총무직을 맡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김용태 의원은 공화당의 실세였다. 민간인으로서 유일하게 5.16에 가담한 사람이다. 박 대통령은 그를 '김 두목'이라고 부르며 각별히 아꼈다. 그런 김 의원의 반발을 무마할 방법이 없었으리라. 나는 담백하게 처신했다. 정치자금으로 받은 돈을 모두 반납하고 원내총무직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 원내부총무직도 사양했다.

이 내용을 보고받고 미안하게 생각한 박 대통령이 나를 체육회장 자리에 앉히기로 결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청와대의 결심이 곧 법이었던 시절이다. '민관식 체육회장'이 '방침'이었다면 나로서는 '피할 수 없는 잔'이었다. 나는 결국 체육회장직을 맡기로 했다. 도쿄올림픽 개막까지 여덟 달 남은 때였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