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855)제80화 한일회담|회담 참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이번 회부터 필자가 바뀝니다.
▲필자 소개=해오 김동조씨(65·부산 출신)는 정부수립 이후 제4공화국까지 한국외교의 기틀을 다진 우리 외교의 산 증인이다. 일본 구주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하던 43년 일본 고문행정과에 합격했고 49년 체신부관리로 관계에 투신, 51년 외무부 정무국장으로 전신했다. 정무국장·차관을 거쳐 5.16후 60년대초 대한무역진흥공사 사장을 지낸 후 주일대표부대사, 주일·주미대사, 외무장관, 대통령 특보, 석유개발공사 사장을 역임했다.
한일회담-. 많은 분들이 나름의 소회가 있겠지만 나로서는 정말 특별한 인연과 감회가 서려 있다.
한국전쟁이 치열하던 50년대초 피난 임시수도 부산에서 회담준비의 실무작업을 총괄하면서 인연을 맺어 65년 내손으로 마무리지었으니 그 감화가 어느 누구에 비해 상정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내가 관여한 한일회담은 7차례의 회담중 예비회담과 1, 4, 7차였다. 1차때는 외무부 정무국장으로서 전문위원이라는 자격을 갖고, 4차때는 외무차관으로 본부에서 훈령을 내리는 입장이었고, 7차때는 주일 대표부대사로서 수석대표를 맡았다.
2, 3차때는 비록 직접 참석은 안했지만 55년 장차의 한일회담에 대비해 3차때까지의 회담토의내용을 종합적으로 집성한 『한일회담약기』를 내손으로 펴내 비교적 소상하게 회담의 전후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약기는 5백9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극비문서로 간행됐는데 내가 쓴 서문은 다음과 같다.
『(전략)이 약기는 의사록을 중심으로 하고 각 대표의 보고서를 참작해 정리했으며 부록은 문제를 이해함에 있어서 필요한 것에 한했고 또한 영·일문 등의 경우에는 정확을 기하기 위해 원문대로 게재했다. (후략)』당시 정황으로는 회담이 언제 다시 재개될지도 모르는 터에 회담재개의 경우 누가 대표가 되든 간에 이 한권의 책으로 전후사정을 파악해 회담에 임할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보다 내 감회가 깊은 연유는 세 가지 사실 때문이다.
첫째가 65년 한일 국교정상화때 6억달러의 청구권 자금 및 경협액수에 평화선을 팔아먹었다는 격렬한 비판을 받았던 그 평화선 선포 입안의 주무자가 나였다는 점이다.
일본이 한일회담에 그나마 성의를 갖고 임하게 한 지렛대가 됐던 평화선 입안에는 여러 관계인사가 참여했지만 그 주무는 나와 김영주 외무부정무과장이었다. 특히 일부인사가 일본과의 정치분규를 피하기 위해 원안에 넣지 말자고 주장했던 독도를 내가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주장, 관철시켰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평화선이 있음으로 해서 일본은 좋든 싫든 간에 그 타개를 위해 한일회담의 필요성을 한층 절감했던 것이다.
또 다른 두 사연은 한일회담 때문에 외무부를 떠나야했고, 또 역설적으로 그로 인해 다시 복직했다는 기연이다.
나는 체신부 감리국장에서 51년6월22일 외무부 정무국장으로 옮겨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52년 7월부터 2년간 주중대사관 참사관을 지낸 것을 제외하고는 정무국장 두차례 통산 4년, 외무차관 2년 4개월을 본부에서 근무했다. 그러다가 59년9월12일 차관직을 의원면직형식으로 물러나야 했던 데는 한일회담에 따른 구설수 때문이었다.
이승만대통령은 내가 차관으로 있던 59년 당신의 한일회담 정책을 비판한다는 모공관책임자의 유명한 게릴라식 보고를 받고 격노했다. 나중에 자세하게 내막을 밝히겠지만, 사실 나는 그때 그 일로 파면직전에서 의원면직의 형식을 취해 공직을 떠났다.
한 2년간 재야에서 변호사 개업을 거쳐 대한무역진흥공사 사장으로 재직중이던 64년 여름 어느날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았다. 주일대표부 대사직을 맡아 한일회담을 마무리 지을 의향이 없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당시 막바지에 접어든 이 회담의 타결을 위해 수석대표를 맡길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관에서는 당시 이동원 외무장관이, 재계에서는 이병철 삼성회장이 각기 나를 적임자로 추천했다는 박대통령의 설명이었다
나는 박 대통령에게 몇 가지 진언을 제시, 승낙을 받고 수석대표를 맡아 6개월만에 회담을 타결지었다. 물론 당시는 한층 격렬한 반응이 있었고, 지금도 일부에서는 왈가왈부의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당시 최선을 다했고 그것이 우리국가 재건에 일조했다고 자부한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