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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운 조롱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얼마 전 어머님 생신으로 시댁에 다니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버님께서 조롱박 두 개를 넣어주셨다. 이북에 두고 오신 고향의 전원을 못 잊으시는 듯 자그마한 앞마당에 박을 심으셨나 보다.
이것저것 짐과 함께 무거운 보따리에 박의 무게를 부담스러워 하며 가져와선 아무데나 놓아두었다.
톱으로 켜서 삶은 다음 바가지를 만들어 간장 종지로 쓰라시던 아버님 말씀이 생각났지만 아기와 생활하다 보니 짬도 나지 않았고 다소 귀찮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대로 두었다 간 썩을 것도 같고 난생처음 해보는 일에 호기심도 동해서 마침 놀러 온 동생에게 아기를 맡기고 톱을 준비했다. 내 주먹을 두개씩 이어 붙인 것 같은 조롱박에 서투른 톱질로 몇 번의 흠집을 내고서야 박을 켤 수가 있었다. 반반씩 갈라진 박은 검은 회색빛 씨앗과 엷은 연두빛이 도는 속으로 꽉 차 있었다. 씨를 대충 빼내고 끓는 물에 넣어 삼기 시작했다. 10분쯤 푹 삶아서 건져내니 단단하던 박 속은 풀을 쑤어 놓은 것처럼 되었고 약간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다시 그것을 깨끗이 긁어내고 껍질을 숟갈로 살살 벗겨 냈더니 너무나 귀엽고 앙증스런 네 개의 쪽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장에 가면 예쁜 그릇 천지인데 그건 해서 뭐 하느냐고 핀잔을 주던 동생도 하나만 달라고 떼를 쓴다. 자랑삼아 들고 나갔다가 언니한테도 빼앗겨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쪽박을 지금 소중히 말리고 있다.
생활의 작은 도구를 하나 만드는 데도 이렇듯 정성을 들였으니 옛 여인들의 살림살이는 얼마나 맵시 있고 다감한 정으로 덮여 있었을까. 옛것을 대하면 마치 내 것 인양 가슴 뭉클하게 느껴지는 친근함도 아마 모든 것에 정성으로 대했던 우리 조상들의 숨결 탓인 것 같다.
문명의 이기로 인해 자칫 해이해지기 쉬운 살림하는 이의 마음가짐과 옛것에 대한 멋스러움을 깨닫게 해주신 아버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내년엔 나도 박을 심어 가까운 친구들에게 조롱박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고 싶다.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송산 3일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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