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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짓글에 숨쉬는 추사(秋史)의 인간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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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추사 김정희가 편지 글씨체에 대한 견해를 밝힌 ‘마천십연’. "70년 동안 열 개의 벼루를 갈아 없애고 천여 자루의 붓을 다 닳게 했으면서 한 번도 간찰의 필법을 익힌 적이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풀 옷에 나무 열매 먹으며 또 한 해를 지나니 나이도 오십이 꽉 찼습니다. 스님은 당연히 주름살 지지 않는 방법이 있을 터이나, 나같이 떠도는 신세는 이가 성글어 이쑤시개도 감당하지 못하고 머리털은 빗에 차지도 못한 채 오늘은 또 어제와 다르니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1835년 초의(草衣) 스님에게 보낸 편짓글이다. 일반인은 명필'추사체(秋史體)'로 기억하고, 지식인은 '일세(一世) 통유(通儒)'로 기리는 추사다. 조선이 낳은 큰 학자요 천재 예술가에게도 이렇듯 곰살궂은 면이 있나 새삼스럽다. 추사가 남긴 간찰(簡札:편지)은 생활 속 시시콜콜한 얘기가 내용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글씨체로 펼쳐진다. 간찰이 추사가 시기별로 남긴 글씨를 가늠하는 기준작으로 중요한 까닭이다. 기괴하게 보일 만큼 개성이 강한 추사의 큰 글씨가 '문자미(文字美)'에 갇혀 있던 한자를 '회화미(繪畵美)'로 돌려놓았다면, 조금조금 하면서도 다 다른 추사의 작은 글씨는 그 공부 바탕과 경로를 담고 있는 기초 자료라 할 수 있다.

11일부터 20일까지 과천 시민회관 전시실에서 열리는 '붓 천 자루와 벼루 열 개를 모두 닳아 없애고-추사의 작은 글씨'는 '추사체'의 형성 과정을 편지.시.산문.그림 등 124점으로 살피는 특별전이다. '마천십연(磨穿十硏)'등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 81점이어서 추사를 재발견하는 한 계기가 되고 있다. 과천은 시 차원에서 추사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 추사가 제주와 함경도 북청에서 힘겨운 유배 생활을 끝내고 예순 일곱 살에 정착한 고장이기 때문이다. 추사 탄신 220돌, 서거 150주년을 맞는 2006년을 앞두고 과천향토사연구회(회장 이정찬)와 추사연구회(회장 최종수)가 팔을 걷어붙였다.

전시 준비 위원으로 참여한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는 "추사 간찰의 가치는 내용에 있다. 사후 150여 년 동안 지나치게 예술 세계에만 비중을 둔 나머지 소홀히 해온 선생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려준다"고 설명했다.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한국 현대 서예가 추사 글씨를 다시 돌아봐야 할 이유다. 전시에 나온 편지를 풀이한 김규선 독립기념관 국역연구원은 "한 줄 인사말을 써도 남다르게, 일상 표현도 특출하게 쓴 추사의 편지를 읽다 보면 절로 감탄하게 된다"고 말했다.

개막일인 11일 오후 1시부터 과천시민회관 2층 시티홀에서 '추사 김정희 학술 세미나'가 열린다. 02-504-6513.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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