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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친정어머님이 며칠전 일흔아홉번째 생신을 맞이하셨다.
아들딸들이 차례차례 만수무강 하시라고 큰절을 올리자 어머님은 눈시울을 흐리시며 흰머리난 큰아들 양손을 꼬옥 잡아 주셨다.
『나는 늙더라도 내 아들·딸들은 늙지 않을 것 같았는데 나보다 너희들머리가 더 하얀것 같구나』라시며 옷고름에 눈물을 닦으셨다.
학교라곤 다녀본 적이 없는 어머님이지만 일제때 밤마다 끌려다니며 한글과 일본어를 몇마디 배우고 큰아들이 보통학교에 입학하자 아들에게서 한글을 익혀 늘 손에서 책을 떨쳐버린적이 없으셨다.
어릴때 기억으로는 낮에는 열심히 농사일을 하시고 밤에는 어린 우리들을 동그랗게 모여앉히신 후 춘향전과 장화홍련전, 콩쥐팥쥐등을 나지막하게 읽어주시며 아버지 없는 우리들의 빈 가슴을 채워 주시곤 하셨다.
오래전 큰며느리를 볼때 어머님께서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으셔서 갑자기 당황했다는 큰 올케의 목소리가 지금도 떨리는 듯 하다.
지금도 머리에 동백기름을 곱게 바르시고 두툼한 돋보기 사이로 내려다보시는 고서들의 글귀들은 주옥같은 문장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 어머님을 대하노라면 늘 천사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품에 안기며 어린아이처럼 군다.
세아이의 엄마가 된 중년여성인 지금도 엄마라는 단어앞엔 공연스레 가슴이 울렁이고 복받쳐 흐르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
커다란 창호지에 붓글씨로 또박또박 내려쓴 어머님의 편지를 한달에 두세통씩 받을때의 기쁨은 가난한 내 마음을 흡족하게 충족시켜준다.
서점가를 지날때면 내가 보고싶은 책보다 어머님이 읽으실 적당한 책이 없을까 하고 머뭇거리곤 한다.
돌아오는 휴일쯤엔 어머님을 모시고 서점에 들러 좋아하시는 책 몇권을 선물해야겠다.
오랜만에 어머님의 책 읽는 구성진 목소리를 아이들과 함께 오순도순 귀기울이는 다정한 시간을 마련하리라 마음먹어본다.

<강원도평창군대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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