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랏차차 '88세 청년'] 11. 모교서 박사학위 취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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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서울 종로구 창신동 동덕여고 강당에서 열린 박사학위 취득 및 귀국 축하연 때의 모습. 맨 왼쪽이 아내 김영호,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필자다.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정권이 바뀌었을 때 도망자가 되거나 범법자의 굴레를 쓴다. 1961년 5.16이 일어난 뒤 정치인들의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당당할 수 있었다. 금전적으로 부정을 저지른 일이 없으며 어떤 스캔들도 없었다.

나는 시련이란 게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5.16으로 국회가 해산돼 의원 자리에서 물러난 나는 새롭게 도전할 대상을 찾았다. 한동안 용산의 메릴랜드대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하다 그만두었다. '내가 이 나이에 영어를 배워 통역사가 될거냐, 아니면 장사를 할거냐' 싶었다. 영어책을 내려놓고 사법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당시 내 모습은 61년 '실화잡지' 9월호에 '도서관 개근생이 된 민관식씨'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시간표를 짜놓고 독서에 몰두하던 어느 순간 또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국회의원까지 한 내가 이제 와서 고시공부를 해 판사가 된들 무엇하며 변호사가 된들 무엇하나.' 그러다 생각해 낸 것이 박사학위 취득이었다.

58년 무소속으로 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의 일이다. 자유당 공천으로 나의 지역구인 서울 동대문 갑구에 출마한 전성천씨는 줄곧 자신의 학력을 자랑했다. 그는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땄다고 강조하면서 "민관식 후보는 영어도 못하는 사람"이라고 공격했다. 선거는 나의 압승으로 끝났다. 민관식 2만6200표, 전성천 5800표. 그러나 그의 학위 자랑이 비위에 거슬렸다. 이때의 불쾌감이 자극이 됐다. "오냐, 기회가 되면 나도 박사학위 하나 따 주마." 또한 이 일을 계기로 결혼하기 전에 '교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다'고 했던 장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마음의 짐도 무겁게 느껴졌다. 모교인 교토대학에 유학하기로 결심했다.

일본과 국교가 없던 시절이었다. 초청장 없이는 여권 수속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교토대학 은사인 이노우에 교수에게 편지를 보내 초청장을 부탁했다. 62년 2월에 서류 일습을 갖추어 여권 발급을 신청했지만 문교부로부터 보류 결정을 통보받았다. 당시 나는 5.16 주도세력에 의해 '구 정치인'으로 분류돼 있었다. 같은 해 6월, 우여곡절 끝에 여권을 발급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대학 대학원 입학 수속을 시작했다. 하지만 만성 맹장염이 악화돼 오사카노재병원(大阪勞災病院)에 입원해 수술부터 하게 됐다. 퇴원 후 입학 수속을 마치고 귀국한 것이 8월, 두 달 후 나는 다시 교토로 건너가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63년 3월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논문 제목은 '한국에 있어서의 민주정치의 실태'. 교토대학의 첫 한국인 박사학위 취득자였다. 한 해 전 10월 교토에서 공부를 시작한 후 반년도 안 걸렸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원래 교토대학원은 5년 이상 대학원 과정을 이수토록 돼 있었다. 그러나 예외 규정도 있었다. 교수회의 심사를 통해 대학원이 요구하는 수준의 학력을 보유했다고 인정받으면 필수 강좌만 이수하는 조건으로 논문을 제출할 수 있게 했다. 어렵사리 교수회 심사를 통과한 나는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나는 더 이상 혈기방장한 청년 유학생이 아니었다. 박사모를 쓸 때까지 감히 피눈물 나는 고생을 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나는 누가 시키는 일은 신이 나서 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내가 마음먹고 시작한 일에는 최선을 다해 전념한다. 인생의 전환점에서, 학문을 선택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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