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당을 기리며 … 질마재는 시에 취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고 서정주 시인

스승은 갔어도 시의 향기는 영원하리-. 미당 서정주 시인의 제자들이 3일 오후 전북 고창군 미당시문학관 앞에 전시된 국화꽃을 바라보며 가을 시정에 빠져들었다. 고창= 안성식 기자

100억 송이 국화 옆에서 미당문학제
전북 고창군 미당 서정주 생가 옆 미당시문학관 일대에 노랑 물결이 일렁인다. 3일 오후 '2005 미당문학제'가 열린 문학관 인근 들판 5만 평에 심은 국화꽃 100억 송이가 만발했다. 5년 전 타계한 시인 미당의 '국화 옆에서'가 절로 터졌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시인을 기리며 가을 국화의 바다에 흠뻑 빠졌다.

이날 미당시문학관에서 열린 미당문학제에서 장석주 시인이 미당의 '선운사 동구'를 낭송하고 있다. 장 시인 뒤로 김기택.서지월.문태준.문정희.이근배 시인(오른쪽부터)이 보인다. 고창=안성식 기자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50여 호 모여 사는 이 외진 동네로 들려면 고개 하나 넘어야 한다. 소 등에 얹는 '길마'란 도구처럼 기다랗다 하여 고개는 동네 억양 더해 질마재라 불렸다.

80년쯤 전 질마재 너머. 아낙네들 빨래터 수다를 곧잘 따라하는 사내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집 근처 외가에 자주 놀러갔다. 외할머니가 들려주던 옛날 이야기를 소년은 좋아했다. 당신 무릎에 누워 소년은 꿈을 꾸었다. 임경업 장군처럼 오랑캐 무찌르고 춘향이랑 애절한 사랑도 나눴다. 그때 국화꽃 한 송이 피었으리라. 노란 꽃 바라보며 누이를 떠올렸으리라. 소년의 이름은 정주(廷柱). 한학을 배운 아버지 서광현씨가 나라의 기둥이 되라고 장남에 붙인 이름이다.

세월은 무던히도 흘렀다. 옛날 이야기 좋아하던 소년은 5년 전 저승으로 갔다. 소년이 열 살까지 살았던 집은 정갈하게 복원됐고 바로 옆의 옛날 초등학교 자리엔 그를 기린 문학관이 들어섰다. 그리고 문학관 내려다보이는 무덤가엔 국화꽃이 심어졌다. 한두 송이 아니라 100억 송이송이 심어졌다.

11월 3일 오후 거기에 '시의 제전'이 펼쳐졌다. 재단법인 미당시문학관과 사단법인 고창국화전회가 주최하고, 중앙일보.동국대학교.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는 '2005 미당문학제'는 노랑 물결과 함께 열렸다. 겨레의 정서를 가장 곱게 노래했다는 미당 서정주(1915~2000) 시인의 서거 5주기와 탄생 90주년을 맞아 3, 4일 열리는 미당문학제 첫날 행사에 1000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중앙일보 권영빈 사장과 이어령 고문, 동국대학교 홍기삼 총장, 유족대표로 참석한 미당의 동생 서정태옹, 미당시문학관 정원환 이사장을 비롯해 올해 미당문학상 수상자 문태준 시인, 지난해 수상자 김기택 시인, 이근배.문정희.장석주.정우영.이재무.박덕규.전윤호.허혜정 시인, 평론가 박혜경.김수이.홍용희씨 등 후배.제자문인 100여 명과 문학관을 설계한 건축가 김원씨, 방송작가 전옥란씨, 관광객, 주민, 학생 수백 명이 문학관 마당을 가득 메웠다.

동국대 윤재웅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첫날 행사는 올해 신설된 미당백일장 당선자에 대한 시상식으로 시작했다. 3일 오전 초.중.고.일반부로 나눠 치른 백일장은 문정희.서지월 시인 등이 심사에 참여해, 시 '꽃향기 그리고 국화'를 응모한 정경진씨가 대상인 중앙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이어 중앙일보와 문예중앙이 주최한 미당문학상 시상식이 진행됐다. 올해 수상자 문태준 시인은 "벌판에 오직 국화만 만개한 이곳에서, 미당 선생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보이고 들리는 듯한 곳에서 상을 받게 돼 더 큰 영광이면서 동시에 방일한 마음을 다잡게 된다"고 소감을 전했다.

제자.후배 시인들의 시 낭송회는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였다. 이근배.문정희.장석주.김기택.전윤호.서지월.문태준 시인은 다 함께 단상에 올라 각자 고른 미당의 시 한 편씩을 낭송했다. 특히 대구의 서지월 시인은 미당의 '서지월이 보내 홍시'란 시를 낭송했다. 이 작품은 서 시인이 미당 생전에 홍시를 보냈더니 감사의 뜻을 시로 노래한 사연이 깃든 시다. 이어 소리꾼 장사익씨가 미당의 시 '저무는 황혼'에 가락을 붙인 자작곡을 노래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첫날 행사는 삼성노블카운티 영솔리스티 챔버오케스트라의 축하 공연으로 끝을 맺었다.

4일엔 미당의 여섯 번째 시집 '질마재 신화'출간 30주년 기념 세미나가 문학관에서 열린다. 문학평론가인 동국대 홍기삼 총장이 '질마재, 질마재 신화, 질마재 문화콘텐트'란 주제로 기조 강연을 하고, 박태상 방송통신대 교수의 진행으로 이남호 고려대 교수와 정끝별 명지대 교수, 진주교대 송희복 교수가 미당의 시 세계와 영향에 대하여 발표를 한다.

8월 친일과 관련한 글을 11차례 발표한 이유로 미당은 친일사전 수록 예정 문화계 인사에 올랐다. 그의 시를 기려 세운 문학관에도 친일 시는 전시돼 있다. 행사에 맞춰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회원 등 20여 명은 문학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십 년 전 미당 팔순 잔치 때 일이다. 대쪽같은 성격의 황동규 시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땅에 미당을 읽지 않고 시를 쓴 사람 나와 봐라." 5만 평 들녘에 국화꽃 송이송이, 갈바람에 흔들린다. 휘청, 어지럼증 인다.

고창=장대석,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