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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입주업체 사원 교육현장 가보니] "원가는 절감한다" 외우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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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개성공단의 삼덕통상공장에서 1일 남측 관리자가 개성 주민들 중에서 뽑은 신입 여사원들을 대상으로 '분임조 활동 및 정리정돈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북한 개성 주민인 여직원들이 삼덕통상 공장에서 신발 밑창을 만들고 있다.

"가격이 높으면 소비자가 사겠습니까. 아닙니다. 가격이 낮으면서도 품질이 좋은 제품이 팔리는 겁니다."

'Quality Control'(품질 관리)이라는 큼직한 영어 글씨가 적힌 칠판 앞에서 교육반장이 신입사원 교육에 여념이 없다. 파란 작업복을 입은 100여 명의 여직원들은 "따라해 보세요"라는 반장의 지시에 큰 소리로 칠판 위의 글씨를 읽어 나간다. "원가는 절감한다. 납기는 맞춘다. 안전은 확보한다…."

지난 1일 중소 신발 제조업체인 삼덕통상의 '제6기 신입사원 실습교육' 현장. 부산에 본사가 있는 회사지만 여기는 부산이 아니다. 서울에서 60여㎞ 지나 휴전선을 넘은 북한의 도시 개성이다.

15개 한국 업체가 입주한 2만8000여 평의 개성공단 시범단지. 지난 1일 이곳에서 준공식이 열린 삼덕통상의 공장 강의실에선 북한 종업원을 대상으로 교육이 한창이다. 이 업체의 직원은 모두 2000여 명. 이 중 절반은 개성에 사는 북한 주민이다.

강의실 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자 공장 1층을 메운 재봉 라인이 나타난다. 좌우 열을 맞춰 늘어선 전동 재봉틀 앞에서 북한 여직원들이 신발에 밑창을 덧대고 있다. 벽에 걸린 칠판에는 조별 '현황표'가 붙어 있다. 1조 '스타일'과 2조 '빅히트'의 오늘 목표량은 각각 500켤레다. 1, 2조의 이날 시간당 생산량은 80켤레 안팎. 남한의 여느 공장과 다름없는 생산량이다.

2층에선 역시 개성 주민인 남자 직원들이 프레스를 조작해 고무로 밑창을 만들고 있다. 옆 방에선 신임 여직원들을 대상으로 분임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프레스 소음으로 시끄러운 가운데 남측 중간 간부의 카랑카랑한 부산 사투리가 이어진다. "매일 일과 후 모이가(모여서) 오늘은 뭐가 잘몬된나를 이야기하면 잘몬될 일이 없지예." 한 손에 신발을 든 이 간부는 북한 여직원들에게 분임토의 필요성과 조장의 역할을 설명해 준다. "대충 만들면 안 된다, 잘몬된 일이 있으면 고친다, 마 이기를 분임토의에서 말하는 거라예." 북한 땅에서 '딱 떨어지는' 자본주의 교육이 한창인 것이다.

개성공단 시범단지는 남인지 북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남측이 사전에 명단을 통보해 북한이 허용한 인사들만이 북한군 당국의 검문검색을 받고 들어갈 수 있지만, 일단 들어서면 공단 초입부터 '한국토지공사' '로만손' '신원 에벤에셀' 등의 낯익은 입간판들을 볼 수 있다. 간간이 보이는 김일성 배지를 단 북측 요원들과 종업원들의 북한 억양만이 이곳이 북한 땅임을 느끼게 할 뿐이다.

시범단지에 고용된 북한 주민은 지난달 현재 3800여 명. 삼덕통상은 내년 상반기까지 1000명을 추가로 뽑을 계획이다. 이 업체 관계자는 "북한 종업원 중엔 대학 졸업자도 있다"며 "교육 습득 속도가 칭다오(靑島) 공장의 중국인 직원들보다 훨씬 빠르다"고 했다. "사회주의 습성에 젖어 있으리라 우려했는데 막상 일을 시켜보니 북한 직원들은 추가 근무수당을 주는 야근이나 일요일 근무를 마다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공장 북한 종업원의 기본급은 57.5달러. 삼덕통상은 경의선 철도 연결 공사가 완료되면 개성공단은 부산 본사와 하루 물류권으로 중국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배로 싣고 오는 것보다 시간과 비용이 줄어들 것으로 기대한다. 통역이 필요없는 이점도 있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사정은 매우 복잡하다. 상당수 입주회사의 성패가 한.미관계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삼덕통상의 경우 미국 유명 신발업체의 OEM(주문자상표 부착생산)을 따는 게 최대 관건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이 개성공단 제품을 '북한산'이 아닌 '한국산'으로 인정해 줘야 한다. 그래야 특혜관세 대우를 받아 입찰 경쟁력을 확보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밖으로 나가 공단과 남의 문산을 연결하는 도로에 오른다. 바로 한국전쟁 때 북한군 방호산 소장이 지휘한 6사단 병력이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남침했던 '서울-개성 축선'이다. 55년이 흐른 지금 한국 직원의 출근 버스와 공단 조성사업에 동원된 현대아산의 대형 트럭이 북으로 올라가고 있다. 주변에 배치됐던 북한군 보병.기갑부대는 공단 조성 후 이동한 것으로 군 당국은 보고 있다. 그러나 장사정포들은 철거되지 않고 어딘가에 재배치돼 여전히 서울을 겨냥 중이라고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개성=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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