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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산전 후 90일 휴가 '그림의 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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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정부가 내년 1월 1일부터 아이를 낳은 여성근로자가 받는 산전후 휴가 급여(90일분의 통상 임금)를 전액 고용보험에서 지급키로 함에 따라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들은 모성보호에서 더욱 소외될 전망이다. 현재의 산전후 휴가 급여는 60일분은 사업주가, 30일분은 고용보험이 지급하고 있다. 따라서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직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들은 일을 계속 하더라도 산전후 휴가급여를 기대할 수 없게 됐다.

◆ "임신 사실을 알리지 마라"=내년 1월에 출산 예정인 송경아(가명.32)씨는 지난 21일 회사로부터 계약이 만료되는 올 연말,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통고를 받았다. 공구판매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4년간 경리 일을 해 온 송씨에게 사장은 "회사가 산전후 휴가 등에 따른 부담을 지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송씨는 "상담창구도 두드려 봤지만 우리 회사처럼 고용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은 경우는 보호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만 알게 됐다"며 "저출산 문제로 떠들썩하지만 이 같은 지경이라면 먹고 살기 힘든 비정규직 여성이 아이 낳을 엄두가 나겠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파견직으로 A백화점에 근무하던 김정화(가명.28)씨는 임신 5개월이던 지난 7월,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렸다가 13일 뒤 일방적으로 해고됐다. 본사에서 도장과 의료보험증을 보내라고 해서 줬더니 퇴사 처리를 해버렸던 것. 김씨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백화점 측이 며칠 동안 일도 할 수 없게 괴롭혀 결국은 그만두고 말았다"고 억울해 했다.

이처럼 임신.출산 등을 이유로 부당 해고를 당하거나 재계약을 거부당하는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들이 많다. 서울여성노동자회가 운영하는 평등의 전화에는 산전후 휴가를 달라고 하면 ▶ 재계약을 하지 않거나▶ 퇴사 압력을 넣거나▶산전후 휴가 급여를 지급분의 50%만 주거나▶산전후 휴가를 간 뒤 15% 이상 연봉이 삭감되는 등의 사례가 줄을 잇고 있다.

◆ 비정규직엔'그림의 떡'=2005년 현재 전국의 가임기(25~39세)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는 108만여 명으로 여성 임금 근로자(211만여 명)의 51%에 달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장지연 박사의 집계에 따르면 이들 중 고용보험에 가입해 있는 직장에 근무하는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의 비율은 19.2%에 불과하다.

이는 내년부터 산전후 휴가 급여를 고용보험에서 부담한다 해도 전체 여성 임금 근로자의 40%는 모성보호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는 말이다. 더구나 육아휴직의 경우 꿈도 꾸기 어려운 실정이다. 평등의 전화 황현숙 소장은 "영양사, 학교의 기간제 교사, 은행의 계약직 직원, 학습지 교사 등 가임기 여성들이 주로 하고 있는 업종이 주로 비정규직으로 되면서 모성보호를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한국여성개발원 김태홍 박사는 "현재와 같은 모성보호 조항은 노조가 있는 대기업에 종사하는 정규직 여성 정도라야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 '출산 전후 해고 금지' 법에 반영해야=황 소장은 "근로기준법 30조를 고쳐 산전후 휴가 기간과 휴가 후 30일간은 해고하거나 근로계약을 해지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 소장은 또한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에게 산전후 휴가를 주는 기업에 대해서는 국가가 지원금을 주거나 대체인력을 지원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박사는 "계약직 직원에게 산전후 휴가를 주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며 "호주 등과 같이 출산으로 해고당한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에게는 국가가 출산 수당 등으로 임금을 보전해 주는 방안도 고려해 볼 만하다"고 말했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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