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이야기 마을] 청국장 초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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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1년쯤 될 무렵 남편이랑 작은 야채 가게를 하게 됐다. 돌쟁이 아이를 데리고 가게를 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 무렵 옆방에 할머니 한 분이 이사 오셨다. 가족도 친척도 없는 할머니는 자연스레 우리와 한 가족처럼 돼버렸다.

넉넉한 웃음과 감칠맛 나는 말솜씨를 지닌 할머니는 음식 솜씨 또한 뛰어나셨다.

그해 늦가을 감기몸살을 앓고 난 뒤 힘들고 초라한 현실이 서글퍼져 멍하니 앉아 있는데 할머니께서 쟁반을 들고 오셨다. 잃었던 입맛이 10리는 더 달아나는 쿰쿰한 냄새였다.

"할머니! 저 청국장 정말 싫어요!"

"에이, 입맛 없어도 잘 먹어야 털고 일어나지. 어서 한 술 떠봐." 할머니가 내 손을 반강제로 잡아끄시는 통에 찌푸린 얼굴로 몇 수저 입에 넣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차츰 매콤하면서 담백한 맛이 입에 감기며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웠다. 땀까지 뻘뻘 흘리며 한 냄비를 비우고 나니 잃었던 기운이 돌아와 절로 힘이 솟았다.

그 후로도 내가 아프거나 입맛을 잃을 때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청양고추 송송 썰어 넣고 버섯이랑 두부가 큼직하게 들어간 청국장 찌개를 끓여오셨다. 죄송스러워하는 내게 "우리집은 좁아서 청국장 냄새가 잘 안 빠져. 여기서 먹으면 금방 냄새가 나가잖아. 흐흐흐" 하며 웃으셨다.

우리가 가게를 접고 이사를 하면서 할머니랑 헤어지게 됐다. 할머니는 며칠을 슬퍼하시다가 이삿날 아침 우리 가족을 할머니 방으로 초대하셨다. 작은 상에는 어김없이 청국장이 차려져 있었다.

"이게 내 마지막 밥상이야. 이제 헤어지면 언제 볼지 모르잖아. 많이 먹고 가서 잘 살아."

할머니가 울먹이시는 통에 나는 그 맛있는 청국장도 뜨는 둥 마는 둥 나와야 했다. 지금은 할머니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셔서 소식이 끊겼다. 그래도 요즘처럼 찬바람이 불면 곰삭은 할머니표 청국장 냄새가 그리워지고 난 다시 그 시절 새댁이 돼 할머니 손을 잡고 마음 속 가게로 짧은 여행을 떠난다.

이연옥(39.주부.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11월 4일자 소재는 '커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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