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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 갇힌 지구촌 아이들] 하. 전쟁·테러에 신음하는 아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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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페루의 수도 리마 인근에 탐보리오 마을이 있다. 말이 마을이지 사실은 쓰레기 매립지다. 이곳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여기서 쓰레기를 주워 팔아 생활해 왔다. 그 밑바닥 삶이 극복되기는 힘들다. 30년 동안 여기서 쓰레기를 주워왔다는 한 할머니의 더러운 손가락을 잡은 손자의 여린 손. 희고 깨끗해야 할 아이의 손이 할머니의 손만큼 더럽고 손톱엔 때가 가득하다. 가난의 대물림을 상징하는 손잡음이다.

스리랑카 자프나시 외곽 타밀반군 점령지역에 방치된 탱크가 전쟁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검문을 거쳐야만 이 지역에 들어갈 수 있다.

케냐 북부의 수단 국경지역인 로키초기오에서 목동이 총으로 무장하고 있다. 수단에서 넘어오는 가축 강도를 막기 위해서다.

페루 아마존 분지 벨로리존테 마을의 릭(1)이 엄마의 젖을 힘껏 빤다. 빨아도 빨아도 허기지다. 나오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투르카나족의 에리카(7)는 4월 6일 수단의 가축 강도 공격으로 왼발에 총을 맞았고 절단을 해야 했다.

전쟁과 테러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삶을 파괴한다.
세계 곳곳에서 어린이들은 시달린다.
많은 아이가 죽고, 찢어지는 가난으로 내몰린다.

지난달 25일에 찾은 페루 아마존 분지에 있는 시골 푸칼파의 벨로리존테 마을. 체감 온도 50도에 가까운 이곳에 브리시엘라(4)의 11명 식구들이 돗자리 집에 산다. 나무 막대에 손바닥만한 천으로 하늘을 가렸으니 돗자리 집이랄 수밖에. 2개월 전까지는 침대조차 없어 브리시엘라는 토마스 올리버(12)부터 릭(1)까지 배다른 남매들과 함께 흙바닥에 잤다.

엄마는 밤낮 생선을 팔러 나가니 아이들에게는 손길이 미치지 못한다. 오늘 브리시엘라의 먹거리는 그저께 엄마가 유카얄리 강가에서 잡아온 '잠비나'(정어리)란 소금에 절인 생선 한 마리다. 말라붙었고, 파리가 바글바글 꼬여 있다. 그게 11명의 하루 식사다. 그걸 구워 먹은 지 보름째. 이 마을 200가구의 생활이 비슷하다.

로사리오는 젖을 힘껏 빠는 릭에게 달콤한 젖을 주는 행복을 누릴 수 없다. 술과 축구에 빠진 남편 루트(33)를 대신해 무슨 일을 해서도 하루 끼니를 이어야 한다. 남편이 차크라(농장)를 갖고 있다는 말에 시집 왔지만 막상 강 건너 차크라에 갈 뱃삯(편도 5솔, 2달러 정도)이 없어서 농사를 포기할 지경이다.

마을이 황폐화된 지 30년쯤. 테러 때문이다. 페루 내 유명 테러집단 센드로 루미노소(빛나는 길) 집단의 두목 아비마엘 고스만과 '진정한 인디오 혁명을 추구하자'는 MRTA(투팍 아마르 혁명집단)의 마르틴 폴라이는 1992년 후지모리 정권 때 체포됐다. 그러나 잔당들은 남아 활개를 친다. 현지의 한 선교사에 따르면 이들의 테러로 아마존 분지에서 한 달 평균 100명이 죽는다. 페루의 65%에 이르는 아마존 분지는 비가 오면 단절돼 게릴라의 천국이다. 페루 정부는 80년대 이래 아마존에서만 2만8730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산한다. 현지인들은 "이곳은 동물만 축복받은 땅"이라며 고개를 젓는다.

스리랑카에도 전쟁의 상처가 있다. 수도 콜롬보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스리랑카 북단 자프나는 이 나라 인구의 18%인 타밀족이 모여 사는 도시다. 95년 정부군은 타밀족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반군(LTTE)을 겨냥, 이곳을 무차별 공습했다. 그 후 10년. 계속되는 테러와 게릴라전은 복구의 틈을 허락하지 않았고 스리랑카 제2의 도시 자프나는 폐허로 남았다. 이제 사람들은 이곳을 '버려진 땅'이라 부른다.

시내에서 15km 떨어진 마바디로드. 방금 전쟁을 치른 듯 파괴된 건물이 늘어선 이 마을에 니고지니(15)와 6명의 식구가 산다. 폭격 전 창고로 쓰였을 허름한 10여 평 공간이 가족의 보금자리다. 10년 전 폭격에 아버지와 할머니가 죽었고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난민촌을 전전하던 니고지니 가족은 지난 겨울 이 곳에 정착했다. 삶의 바닥을 떠돌던 소녀는 불평할 줄 모른다. 니고지니는 "지붕이 남아 있어 비를 피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며 흐뭇해한다.

2002년 정부와 반군 간의 정전 협정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니고지니는 살아남기 위한 또 다른 '전쟁'을 시작했다. 니고지니는 흙바닥 집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종일 팝콘을 만든다. 동생 바시라(12)가 거들고 엄마가 내다 팔아 버는 월 1500루피(1만5000원가량)로 생계를 잇는다. 엄마 마야(38)는 "다섯배는 더 벌어야 음식과 옷을 살 수 있다"며 한숨 짓는다.

유일한 세간인 낡은 화덕에는 마른 콩으로 만든 죽이 흔적만 남아 있다. 제대로 먹지 못하니 아이들은 제 나이보다 서너 살은 작아 보인다. 스리랑카는 무상교육을 하지만 니고지니는 3년 전 학교를 그만뒀다. "공책과 교복 살 돈이 없어서요"라고 말하는 얼굴엔 체념과 아쉬움이 뒤섞인다.

전쟁의 그림자는 막내 비투션(6)의 삶에도 파고들었다. 비투션은 태어나서 한번도 제대로 된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폐허를 놀이터 삼아 부서진 벽돌을 쌓고 포탄이 뚫고 간 자리를 오가며 숨바꼭질을 한다. 비투션이 노는 마을 공터 옆에는 지뢰 매설지임을 알리는 붉은 해골 표지가 늘어섰다. 거리를 메운 군대와 반군에게 살해된 시민의 참혹한 사진이 실린 신문은 비투션에겐 일상이다. 반군에 비투션 또래의 소년병도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비밀'이다. 평화를 누려본 적 없는 아이는 평화를 소망하는 법조차 배우지 못하고 자란다.

소.양 뺏기 위해 부족 간 '가축 전쟁' 잦아
케냐 나남 부락의 실상

케냐 북부, 수단 접경지에 있는 투르카나족의 나남 부락엔 아빠 없는 집이 많다. 수단 부족들과 소.양을 약탈하는 '가축 전쟁'을 벌이다 죽었기 때문이다. 투르카나족은 아직도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움막에 살며 유목이 생업인 원시 부족이다.

야가이(3)의 아빠는 지난해 수단으로 가축 전쟁을 갔다가 죽었다. 아바유(6)의 아빠 조지나위(32)도 그렇고, 야카이(7).데델리(5.여) 남매, 로디라(8)의 아빠, 나우칸 형제(9,6)의 아빠 모두 그렇게 죽었다.

애들에겐 아빠가 죽었다는 사실이 큰 충격은 아니다. 그런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도 어떻게 죽었는지 시시콜콜 알려들지 않는다. 거기에 이 아이들의 엄마마저 남편이 죽은 뒤 시름시름하다 죽었다.

야가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누더기 윗도리에 아랫도리는 훌렁 벗고 쏘다닌다. 하루 한 끼 삶은 옥수수 한 줌으로 식사는 끝이다. 전기도 없는 원시 마을, 어둠이 깃들면 흙바닥에 엎어져 잔다.

에카랄라 엘림(9)은 지난해 다른 상황에서 아빠를 잃었다. 밤에 자다가 총소리를 들었다. 수단의 가축 강도가 들이닥친 것이다. 그날 엄마.아빠, 형 세 명, 누나 두 명이 죽었다. 8명 가족 중 7명을 하룻밤 새 잃었다.

수단의 가축 강도는 끊임없이 온다. 가장 최근엔 4월 29일 밤이었다. 총을 마구 갈겨댔다. 다행히 가축이 부락 내에 없었기 때문에 뺏기지 않았고, 죽은 사람도 없었다. 1994년에는 부락에서 100여 명이 죽었다. 이렇게 해서 최근 1~2년 사이 부락에 고아가 30여 명이나 생겼다. 엄마만 있는 집도 있다.

애들은 부락 내 일곱 가족이 나눠 맡고 있다. 케냐 정부의 손길은 전혀 미치지 않는다.

고아나 이들이 얹혀 사는 가족의 애들이나 대개 하루 한 끼 식사면 끝이다. 그런 모습을 보는 어른들의 마음엔 복수심이 타오르고, 수십 년 수단 내전으로 넘쳐나는 총들을 움켜쥔다. 오늘도 수단과 투르카나의 가축 강도들이 야음을 틈타 국경을 넘는다.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고아가 된 애들이 국경 양쪽에서 울고 있을 것이다.

전쟁과 어린이
아시아에만 소년병 8만 명
90년대 2000만 명 집 잃어

전쟁은 어린이의 삶을 속속들이 파괴한다. 1990년 이후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의 90%는 민간인이며 이 중 80%는 여성과 어린이다. 아이들은 죽거나 부상하지 않더라도 고아가 되거나 납치.강간 등 폭력에 시달리게 된다. 집과 학교를 잃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받은 정신적 충격은 아무도 보듬어주지 않는다. 집을 잃은 아이들은 난민촌을 오가며 불안한 삶을 산다. 1990년대 10년 동안 약 2000만 명의 어린이가 전쟁과 관련된 위협 때문에 집을 버리고 난민이 됐다. 전쟁은 아이들의 순수한 열정을 악용하기도 한다. 지난 3년간 발생한 콩고.미얀마 등 10개국의 분쟁에서 어린이가 전방 최전선에 배치됐다. 징집이 쉽고 순종적이라는 이유로 아시아에서만도 8만 명 이상이 소년병으로 살고 있다.

전쟁이 끝난 뒤 버려진 무기와 폭발물들도 아이들의 삶을 위협한다. 유니세프에 따르면 해마다 1만5000~2만 명이 지뢰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는데 그중 3분의 1이 어린이다. 캄보디아에는 인구 2명당 1명꼴인 400만~600만 개의 지뢰가 묻혀 있고 인구 중 0.4%는 지뢰 폭발로 팔.다리가 절단되거나 사망하는 사고를 겪었다.

저개발국일수록 전쟁의 그림자는 쉽게 걷혀지지 않는다. 빈곤은 사람들에게 절망과 공포를 느끼게 하고 자원 확보를 위한 투쟁은 전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20개국 중 16개국이 최근 15년간 대규모의 내전을 겪었다. 전쟁은 또다시 빈곤을 심화시키고 악순환은 계속된다.

◆ 특별취재팀

아시아 = 김은하 기자, 최병관 사진가 / 아프리카 = 안성규 기자, 이창수 사진가 / 남미 = 이원진 기자, 최재영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사진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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