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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에 출입하시면서 내용을 모르시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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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정치국제부문 차장

“이렇게 말씀을 드려야만 ‘그렇다’고 아시지, 청와대에 출입하시면서 내용을 전혀 모르시네요.”

 지지율 하락을 부른 1월 12일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회견은 1시간반이나 계속됐다. 대통령의 ‘주장’만 이어진 단조로운 회견, TV 생중계를 보던 기자의 귀엔 이 한마디가 쏙 들어왔다. 농담인지 핀잔인지 애매한 뉘앙스였다.

 “장관들과의 독대나 대면 보고가 적어 소통이 안 된다”는 ‘까칠한’ 질문이 발단이었다. 대통령은 “옛날엔 전화도 e메일도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있어서 대면보다 전화 한 통이 편리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도) ‘대면 보고해서 의논했으면 좋겠다’ 하면 언제든지 만나서 얘기 듣고 그래요”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내용을 모른다”며 기자들에게 한 방을 먹인 것이다.

 대통령이 웃었고 기자들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빠 웃음이 안 나오더라”며 분개하는 타사 후배 기자가 있는 걸 보면 분위기 때문에 억지로 웃은 기자들도 있었을 듯싶다.

 억울하긴 양쪽 모두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난 열심히 소통하지만 이를 모르는 기자들이 듣기 싫은 질문만 한다’고 생각했다면 대통령도 억울할 일이다. 기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안 그래도 취재환경이 최악이라는 ‘박근혜 청와대’에서 고생하는데 졸지에 취재도 못하는 무능한 기자들로 전 국민 앞에서 낙인이 찍혔으니 말이다.

 청와대 취재가 까다로운 건 이 정권만의 문제는 아니다. 출입기자 수가 갑자기 불어난 노무현 정부 이후 기자들의 내부 방문취재는 불가능해졌다. ‘우리는 청와대가 아닌 춘추관(기자실이 있는 별도 건물) 출입 기자’라는 푸념이 나온 것도 이즈음부터다. 하지만 이전 정부에선 기자들과의 소통 채널이 꽤 열려 있었다.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비서실장이나 수석들은 그들대로 소통을 넓히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토론을 즐겼던 노무현 대통령은 가끔씩 예고 없이 춘추관을 찾아 간담회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테니스장에서 집무실로 돌아가다 땀 냄새 나는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춘추관을 종종 급습했다. 정정길 대통령실장은 막내 기자들까지 모두를 삼청동 공관으로 초청해 수석들 전원과 함께 만찬 간담회를 열곤 했다. 박근혜 청와대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다. 대통령은커녕 김기춘 비서실장과 함께 식사나 전화 통화를 했다는 기자를 찾기도 ‘하늘의 별따기’라고 한다. 과거 춘추관 송년회엔 대통령까지 참석했지만 지난해엔 실장과 수석들마저 모두 불참했다. 비보도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윗선이 이렇다 보니 청와대 직원들의 기자 기피증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대통령에게서 ‘내용을 전혀 모르는 출입기자’로 지목당한 이들에겐 이런 고충이 있다. 지지율 폭락 이후 청와대는 인적 쇄신을 비롯해 다양한 소통 강화 방안을 궁리 중이라고 한다. 부디 내년 신년회견에선 대통령도 기자들도 억울한 일이 없도록 ‘박근혜 청와대’의 획기적인 대변신을 기대한다.

서승욱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