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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0)제79화 육사졸업생들(243)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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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맹호의 활약>
맹호가 주둔한 퀴논은 말연항으로 월남 제2의 군항이었다. 동쪽은 남지나해이고 서남쪽은 정글지대에 접한 광활한 분지였다.
맹호는 퀴논에 상륙 한지 1개윌여 계속 중대단위의 진지구축과 기지주변의 정찰과 매복으로 전역을 가다듬고 있었다.
당시 맹호의 전술은 1개중대가 적으로부터 연대규모의 공격을 받더라도 48시간이상 버틸수 있도록 견고한 진지부터 구축하는 것이었다.
맹호가 조용히 진지구축만 계속하자 미·월군 관계자들은『아시아 최강의 한국군이 왜 방어에만 신경을 쓰느냐』 『맹호는 종이호랑이가 아니냐』는등 약간 빈정대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 그들은 호랑이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으며 배가 고파도 풀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잘몰랐던 모양이다.
65년11월19일 맹호는 처음으로 중대규모의 작전을 벌였다. 이른바 「추수작전」이었다.
신현수대령(육사10기·중장예편·전 브라질대사·외무부본부대사)이 이끄는 맹호 기감연대는 빈딩생 빈케군 호아히엡 부락주민들로부터 「농사 지어놓은 벼를 추수할 수 있게 베트콩을 쫓아 달라』 는 간청을 받고 드디어 출동한 것이다.
호아히엡 부락은 직경 2.5㎞의 원형분지로 산기슭에는 바나나가 재배되고 있었으며 평야지대는 쌀의 주산지였다고 한다. 기갑연대는 제5중대와 수색중대 1개소대로 작전을 전개, 이 곳에 주둔하고 있던 베트콩 l개중대를 몰아내고 3일간 월남농민(연인원3만5천명)을 들여보내 총84t의 쌀을 수확해 30대의 트럭에 실어 왔다. 이 작전에서 아군은 베트콩 용의자 16명을 생포하고 3명을 사살했으며 동굴10개를 폭파했는데 아군피해는 부상자 l명뿐 이였다.
「추수작전」 에서 자신을 얻은 맹호는 점점 「무서운 호랑이」 로 변해갔다.
65년11월30일 기갑연대 5개중대가 투입된 「푸락작전」, 12월4일 1연대 1개중대가 참가한「루앗찬전투」, 12월5일의 「화낭작전」, 12월7일 「샛별작전」을 거쳐 12월18일에는 빈딩생빈케군의 키엔나이, 미투안 평야에서 본격적인 「전진1호작전」을 전개했다. 기갑연대의 2개대대 법력이 동원된 이 작전에서 아군은 전사자 1명, 부상자 8명의 피해를 냈지만 베트콩 3명을 사살하고 용의자1백16명을 검거했으며 동굴 57개를 폭파시켰다.
이날 작전에는 월남군의 포사격과 미군의 헬리콥터 지원을 받기로 돼있었으나 D데이 하루 전부터 폭우가 쏟아지자 미·월군은 지원약속읕 어겼다고한다. 비가 쏟아진다고 전투를 중지했던 미·월군들은 그 후부터는【맹호는 무얼하느냐】는 식의 말은 입밖에도 끄집어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계속된 작전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병사들의 음료수문제였다고 한다.
어느 날 작전도중 장병들의 수통이 모두 비게 되자 헬기로 물을 공급해야만 했다.
휘발유 스페어캔에 물을 넣어 헬기로 싣고 갔으나 베트콩의 대공사격이 심해 헬기들이 착륙을 하지 못하고 공중에서 스페어 캔을 낙하 시켰는데 캔이 모두 박살났다. 목이 탄 장병들은 결국 논물을 마셔 갈증을 면했지만 모두 설사병에 걸려 혼쭐이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다음 부터는 사병 1인당 4∼5개의 수통을 차고 전투에 임하도록 해 장병들의 몸통은 수류탄과 수통으로 장식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또 수통속에는 반드시 소금과 명반을 넣도록 하고 이를 어기는 장병이 있으면 소속 중대장에게 책임을 물어 막대기로 종아리를 때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음료수 소동이 있고 나서부터 사병들은 물대신 정력에도 좋고 무공해 음료인 야자열매의 액을 즐겨 마셨다고 한다.
월남전을 통해 우리국군은 히트 앤드 스테이(hit and stay) 전법을 사용했다.
「치고 기다리는」이 작전은 미군의「치고 움직이기」 (hit and move), 베트콩의「치고 달아나기」 (hit and run)전법과는 대조적 이었다.
우리의「치고 기다리기」전법은 한번 작전하고 나면 그곳에 주저앉아 베트콩을 몰아내고 평정사업을 전개, 양민들에게 삶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주민들은 자연히 우리를 믿고 따르게 되었으며 베트콩에 대한정보를 정확히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이때문에 우리는 월남전에서 희생은 미군의 5분의1로 줄인 대신 전과는 미군 보다 30%이상 올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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