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4>이산30여년…애절한 사연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피난길, 하루 엇갈린 뱃길이 자매를 32년동안이나 갈라 놓았다.
KBS 공개홀에서 얼싸안은 최직녀씨 (55·여·서울화곡2동864의20)와 최무돈씨(50·여·서울 영등포동94) 는 친자매. 갓 결혼한 새댁이었던 두 사람은 희끗희끗한 머리의 노년이 되었고 지긋지긋한 고생과 각각 두번씩 결혼해야만 했던 고통, 함께 살아온 날보다 헤어져 찾아 다닌 나날이 훨씬 길었던 설움에 목놓아 울었다.
이들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해방 전에 돌아갔지만 어머니와 직녀·희식·무돈 3남매는 6·25 전까지 그런대로 유복하게 살았다.
당시 20살이던 외아들 희식씨가 치안대원으로서 빨갱이를 잡아들이다 1·4후퇴때 혼자 피신, 월남하자 고향에 남아 있던 가족은 모두 반동으로 몰려 먼저어머니가 붙잡혀 갔다.
어머니가 매에 맞아 돌아갔다는 소문에 자매는 무서워서 고향에 머무를 수 없었다.
북괴는 이들 자매가 반동가족이라고 이웃과 우물물도 나눠 먹지 못하게 했다. 또 현물세라고 농민들로부터 빼앗은 벼를 이들자매에게 찧도톡 강요, 손바닥이 시커멓게 멍이 들었다.
23살때 결혼해 이웃에 살던 언니 직녀씨와 18살의 미혼이던 동생 무돈씨는 51년10월 한밤중을 이용, 고향앞 바다의 용모도로 피신했다. 용모도는 바닷물이 빠지면 육지와 연결되는 가까운 섬이었지만 당시에는 아군의 점령지역이었다.
안내원의 도움으로 겨우섬에 도착했지만 그곳에서 언니 직녀씨의 남편 강씨가 동생 희식씨와 함께 월남, 국군에 입대했다가 전사했다는 기막힌 소식을 들었다.
홀로된 언니는 연명할 길이 막연해 배나 곯지 않게 하려고 l7살의 동생 무돈찌를 섬에 먼저 피난왔던 동향의 강씨에게 시집을 보냈다. 며칠후 적의 공세가 드세어지면서 섬의 피난민들이 차츰 육지로 뜨기 시작, 동생 무돈씨는 남편 강씨와 함께 남하하는 배를 탔고, 따로 떨어져 살던 언니 직녀씨는 다음날 역시 배를 타고 월남했다.
그러나 동생 무돈씨 부부가 내린곳은 충남 당진이었고, 언니가 내린 곳은 강화도여서 하룻사이의 뱃길이 자매를 생이별시컸던 것.
「산 사람끼리 설마 못 만나랴」 싶어 처음에는 서로 느긋해 했지만 날이 갈수록 감감소식이었다. 찾아야 한다고 마음먹게 됐을 때는 생활고 때문에 엄두를 내기 힘들었다.
동생 무돈씨 부부는 당진에서 남의 땅을 농사지어줘 아들 딸을 남고 근근히 살아왔다. 그나마 60년대초 남편 강씨마저 병사해 무돈씨는 무작정 상경, 청량리역 부근에서 과일·생선 행상으로 손수레를 끌었다. 아이들을 위해 식모살이도 했다.
64년초 무돈씨는 재혼, 딸둘을 낳았으나 재혼했던 남편마저 3년전 병사해 2중의 아픔을 겪고 홀몸으로 살고 있다.
언니 직녀씨는 3년간 강화도에서 나무장사·호떡장사로 연명했다. 그후 배급을 많이 준다는 소문에 인천으로 가 피난민수용소에서도 2년간 있었다. 그동안 동생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충청도에 산다」는 소문뿐,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남의 집 살이를 하던 직녀씨는 57년 재혼, 2남1녀를 두었다. 동생을 찾기위해 신문에 내고 적십자사에 부탁도 했던 언니 직녀씨가 KBS에 출연한 것을 동생 무돈씨의 딸 강선옥씨 (31) 가 본것이 재회의 계기. 자매는 서로의 과거 얘기를 들려주며 눈물범벅이 됐다.
자매는『1·4후퇴때 월남한 희식씨를 찾아 친정의 대를 잇는 것이 남은 소원』 이라고 했다.
글 장재열기자 사진 김주일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