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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장 그는 어떤 인물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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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소위 수수께끼의 레저그룹 명성의 창업자이며 오너인 김철호씨는 어떤 인물인가.
김회장은 38년 9월15일 전북임보군임실읍갈마리304번지에서 김정곤씨의 2남1녀중 장남으로 출생.
임실국교 졸업후 전주서중, 전주공고를 거쳐 한대원자력 공학과 1회 졸업생이다.
64년에 나주 호남비료에 취직, 현 부인 신명진씨를 만났고 68년에 안전과장으로 승진.
안전과장으로 승진하기 2년전인 66년 (당시나이 28세) 부터 광주를 드나들며 운수업에 손대기 시작, 만만치않은 사업수완을 발휘.
그로부터 그가 일으킨 기업은 그의 독특한 경영방침과 PR작전으로 불같이 일어서곤 했으나 전적으로 믿고 맡긴 동업자들의 배신등으로 한창 불처럼 일어설때에 부도가 나는등 타의에 의한 사업실패를 감수해야했다.
그 뒤로 79년 골프장을 인수, 명성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기까지 까다롭기로도 이름난 운수업·건축업·군납업·관광업등을 두루 거쳤다.
오뚝이처럼 쓰러지면 또다시 일어서고, 쓰러지면 또다시 일어서기를 6∼7차례 거듭한 것.
69년 현재 명성그룹부사장인 윤우병씨의 부친이 경영하던 군납업체인 아선산업을 인수, 춘천에서 군납업을 시작, 이즈음에 군계통 인사들과 교류를 갖기시작한 것이 아니냐는 주변의추측. 아선산업은 현재 명성그룹 계열인 현대토건의 전신이다.
윤자병부사장의 부친이 아들이나 사위에게 사업을 물려주지 않고 김회강에게 넘겨주었다는 사실이 특기할만하다. 김회장이 대학재학시 윤씨집에 1년동안 기거한 적이 있는데 이때 윤씨부친이 김회장을 인정하게 되었다는것.
69년12월 경영하던 금강운수에서 부도가 났다. 전체외형20억원중에서 부도금액이 4천8백만원이었으므로 그리 큰것은 아니었으나 그 파급효과는 커서 여기저기에 사업을 펼쳐놓았던 그에게 연쇄적인 피해를 주어 재기불능의 상태로까지 몰고갔던것.
69년에 고향에서 국회의원에 출마, 무소속 『혜성같은 사나이, 용감한 전북인』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출마했으나 투표전날 포기.
71년8월1일 현대신건재라는 목재회사에 부사장으로 취직, 이회사가 안고있는 부채 8천만원을 김회장이 안고 이회사의 주식45%를 인수하는 조건이었다.
부사장취임 2일후인 8월3일 8·3조치, 그가 안기로했던 8천만원의 빚이 사라져버리게되자 『김철호씨는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현대신건재에 들어왔다. 막강한사람이 뒤를 봐주고있다』 는 등의 루머가 생겨났다.
김회강이 이 회사를 1년만에 경영을 정상화시키고 연30만달러의 수출업체로 키웠으나 경영참여당시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데에 실망, 74년 이회사를 떠났다.
74년4월 현대신건재에 사표를 던지고 위로금조로3천만원을 받았다.
이 돈으로 76년 서울성동지하상가를 인수, 부동산업에 손댐. 당시 성동지하상가는 불에 타 새임자를 기다리고있던 터였다.
성동지하상가 1천5백30평을 4친8백만원의 공사비를 들여 복구공사를 하는동안 지하상가 상인들과 분규가 터져 김회장은 투자한돈을 고스란히 포기하고 운영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법정에까지 비화, 송사에 얽히는 시련을 겪게된다.
같은해 전주시 효자동에 20평규모의 예그린아파트를 지어 2백가구를 분양했으나 이것마저 임실국교 동창생과의 동업이 말썽, 실패로 끝났다.
75년에 제주도로 진출, 방랑생활을 하다시피하면서 관광레저에 눈을 돌리기 시작, 76년까지 제주도·설악산·지리산등지를 돌아다님.
이때 북제주군 애월면땅 3만평을 4천만원에 구입, 이름도 생소한 콘더미니엄 건설허가를 제주도청에 냈으나 『콘더미니엄이 뭐냐』 며 4차례나 서류가 되돌아 옴.
제주도에서 콘더미니엄건설허가가 나오지 않자 서울로 다시 올라와 명성관광이라는 회사를 설립.
78년 4월의 일로 태평양여행사를 인수했던 것.
이때부터 김회장은 본격 관광사업을 계획하게 된다.
본격적인 사업을 물색하던중 79년7월 ???씨로부터 오성골프장을 인수하게 되었고, 부킹이 하늘의 별따기였던 당시에 골프회원권은 불티나게 팔려 순식간에 2억∼3억원의 빚은 말할 것도 없고 돈방석에 올라 앉게 된다.
80년10월 명성 콘더미니엄을 설립, 오늘의 초고속성장의 발판을 굳히게된다. 평당3천∼4천원의 땅에 평당 건축비 65만원쯤밖에 들지 않는 콘더를 세워 18평짜리 콘더를 구좌당 4백만원씩 10명에게 분양했으며 그 분양마저 당시의 부동산 투기분과 편승, 불티나게 팔렸다.
설악산 콘더는 양평의 스타월드로, 지리산 레저타운(83년 7월18일오픈)으로, 백암온천으로, 제주도 한라산 레저타운으로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김회장에게 68∼76년까지는 명성의 태풍기이고, 76년까지는 시련기를 거쳐 명성을 탄생시킨 셈.
김회장은 80년12월7일에 중앙교회에서 장로로 안수 받음.
술·담배는 전혀 안하고 채식주의자. 지금도 집에서 마련해가는 도시락에는 고추장에 풋고추가 자주 들어간다. 태권도 유단자, 골프는 핸디15. 부하직원이 어려운 일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기회를 보고있다가 20만원이 필요한 사람에게 1백만원을 아무조건없이 조용히 건네주는 방식등으로 자기부하를 충복으로 만드는 특기.
식구들과는 아직도 외식한번 제대로 못했고 3남1녀를 두었다.
김회장의 사교권은 그가 맡은 직함에서도 쉽게 읽을수 있다. 대한요트협회회장, 골동품수집가들의 모임인 고미술회회장, 민정당창당멤버이자 중앙위원.
문화계에도 발이 넓고 종교계에도 그렇다. 82년1월 『월간문화재』를 인수했고 80년에 드라머센터에서 마당극 토생극을 지원, 81년에 제1회대한민국 국악제를 협찬, 1백50명의 중진·중견화가들의 제2회 한국현대미술대전을 주관, 다양하게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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