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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8) 제79화 육사졸업생들(231) 사이공 도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비둘기부대 주력병력은 3월10일 정오쯤 미해군수송함 제너럴 맨호에 탑승을 완료했다.
인천부두에서 베풀어친 환승식에서 받은 꽃다발을 바닷물속에 던지면서 제너럴 맨호에 승함하는 장병들도 보였다.
1943년에 건조된 맨호는 깊이2백10m·폭25m·무게1만9전6백3lt으로 중앙청크기만한 매머드 수송함으로 1차세계대전 당시 미 제42사단 사단장 「맨」장군의 이름을 땄다는 것이다.
김성은국방장관, 함명수해군참모총장, 합참본부 장성들, 그리고 국회국방위원들이 배에 올라 함내 시설을 돌아보고 장병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하오l시30분 맨호의 육중한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맨호는 우리와는 인연이 있는 배였다. 6·25가 터지자 맨호는 최초로 부산항에 미육군 5연대 병력을 태우고 왔으며 한국전쟁기간동안 총7만5천명의 유엔군을 수송했었다.
우리가 어려울때 우리를 도와준 맨호는 건국 이래 처음으로 원군으로 떠나는 우리 장병들을 수송하게 된것이다.
장병들은 승함하자마자 점심이 배식돼 처음으로 선내식사를 했다고 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많은 장병들이 처음 먹어보는 양식메뉴때문에 웃지못할 일이 많았다고 한다.
메뉴는 빵·콩·정어리·쇠고기·버터·야채·카스텔라, 그리고 특별히 우리장병들을 위해 안남미로 지은 쌀밥과 소금에 절인 오이김치가 나왔다는 것이다.
병사들은 서툰 칼질을 하며 히죽히죽 웃기도 했지만 점심식사가 끝난뒤 스푼 1백여개와 변소에 있던 휴지가 동이났다는 맨호 부장의 불평을 전해들은 수송책임장교 장준언중령(비둘기부대 공병대대장·공병4기·대령예편)은 얼굴이 붉어졌다고 했다.
저녁 식사때부터는 질서가 잡혔다.
처음 약간눈살을 찌푸리던 함내의 미군들도 금방 달라진 비둘기부대장병들의 매너를 징찬했다고 한다.
맨호가 항해하는 동안 남지나해 상공에는 줄곧 미7함대 함재기들이 호위를 했다.
항해 이틀째, 비둘기부대장병들은 특별 이함훈련도 받았다.
경보 사이렌이 울리자 전원 라이프 재킷을 착용하고 전원 전투태세에 몰입했다. 사이공장을 거술러 올라갈때 있을지도 모를 베트콩의 기습에 대비한 것이다.
11일부터 선상교육이 실시됐다. 월남에서 필요한 안전교육과 태권도연습을 통한 체력단련이었다.
당시 육군은 파월장병들에게 『월남에 가면 부대에서 준비한 음료수 이외는 어떤 물도 마시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으며 『환영하는 군증들 틈에도 배트콩이 있다』고 교육을 시켰었다.
군대 만금 교육의 성과가 1백% 나타나는 집단도 드물것이다. 교육을 시키면 시킨만큼 그 부대는 우선 부대원들의 눈빛이 달라지고 군기가 잡히는 것이다.
아마 모르긴해도 비둘기부대가 파월되어 최소한의 희생을 낸것도 현지에서의 고된 훈련과 항해중에도 쉴새없이 정신교육을 강화한 덕분이라고 본다.
비둘기부대가 인천항을 떠난지 3일만에 맨호는 예정대로 필리핀과 월맹사이를 통과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13일하오6시쯤에는 북위 16도선을 통과, 월남령해에 들어섰다는 보고가있었다.
14일 일요일에는 모든 일과를 중지하고 군목 이창식소령의 인도로 사병식당에서 주일 예배가 올려졌고 이날 저녁에는 상륙준비를 했다고 한다.
15일 상오 7시20분 맨호는 붕타우 남쪽 2마일 해상에 앵커링을했다. 도양 2천2백마일, 우리 잇수로 1만리에 가까운 긴 항해끝에 종착역에 닿은 것이다.
맨호의 후미에는 태극기를 단 세척의 함정이 나타났다.
포항과 부산에서 수송·공병장비를 싣고온 810, 812 LST 2척과 이를 호위해온 우리해군의 72함이었다. 15일하오2시 비둘기부대 장병들은 맨호에서 내려 우리해군LST와 월남해군 LST 502호에 옮겨타고 사이공강을 거슬러 올랐다.
강하구에서 사이공부두까지는 45마일,7시간의 항해가 계속되었다.
이름 모를 나무들이 강의 양쪽에 빽빽히 들어서 있고, 가운데로 우중충한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정오 가까이 돼서 72함의 호위를 받은 3척의 LST는 사이공항 월남해군사령부앞 부두에 닻을 내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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