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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now] 쓰레기 뒤지는 까마귀와의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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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일본에서는 까마귀들이 비닐로 된 쓰레기 봉지를 찢고 내용물을 뒤져 먹는 사례가 많다. 이 때문에 악취가 진동하고 까마귀 배설물이 늘어나는 등 도시 환경이 오염되고 있다. 이를 막으려는 인간과 까마귀의 '두뇌 싸움'이 한창이다. [도쿄=지지통신]

19일 오전 도쿄 신주쿠(新宿)의 한 아파트 앞.

수북이 쌓여 있는 쓰레기 봉지 위에 시꺼먼 까마귀 두 마리가 앉아 '식사'에 여념이 없다. 까마귀가 부리로 찢어낸 쓰레기 봉지에서는 내용물들이 새어 나와 악취가 풍겼다. 가까이 다가가 "비켜"라고 소리를 질러보고 발을 굴러 위협도 해봤지만 까마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쪽을 멀끔히 쳐다봤다.

일본에서 까마귀와 인간의 '두뇌싸움'이 치열하다. 노상의 쓰레기 봉지를 마구 뒤져 악취와 배설물을 뿌리는 '검은 집단'에 주민들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자체들도 까마귀의 쓰레기 뒤지기를 막기 위해 각종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 하지만 지능이 개나 고양이보다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까마귀도 쉽사리 물러날 기세가 아니다.

까마귀 문제가 본격 대두한 것은 1994년부터다. 쓰레기 수거차 안에서 가스통이 터지는 등의 사고가 빈발하자 지자체들은 검은색 쓰레기 봉지 사용을 금지하고 내용물을 식별할 수 있게 흰색.청색.녹색의 반투명 봉지를 사용하도록 했다. 이것이 까마귀들에겐 낭보가 됐다. 까마귀는 시각이 발달해 반투명 봉지 안에 있는 것을 전봇대나 전선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먹이가 늘어나자 까마귀 수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도쿄도(都)의 경우 80년대 중반 7000마리였던 것이 2001년에는 3만6400마리로 불어났다. 생태계에도 부정적 영향이 나타났다. 일부 까마귀들은 사람에게도 달려들어 피해가 속출했다.

이에 도쿄도청은 2002년 '까마귀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대적 포획에 나섰다. 최근 3년 동안 5만 마리를 포획해 그 수를 1만9800마리로 줄였다. 그러나 포획에는 한계가 있어 도내 12만700곳의 쓰레기 수거 지점에 망을 쳐 번식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까마귀들이 망 틈새로 교묘하게 부리를 움직여 대는 바람에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신주쿠구 등 일부 지자체에서는 지난해 8월 쓰레기 수거 지점 바로 옆의 나무에 까마귀 모형을 설치했다. "이미 이곳은 접수가 됐다"는 것을 보여줘 다른 까마귀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곧 모형임을 눈치챈 까마귀들이 다시 쓰레기 봉지에 덤벼들었다.

'인간' 측도 가만있지 않았다.

도쿄 스기나미(衫竝)구는 지난주 노란 반투명 쓰레기 봉지를 팔기 시작했다. 까마귀 눈의 세포에는 '유구(油球)'라고 하는 필터와 같은 조직이 있어 인간에게는 반투명한 노란색으로 보여도 까마귀에게는 짙은 노란색으로 보인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최근 6개월간 구내 1300가구에 노란색 반투명 봉지와 흰 반투명 봉지를 병행 사용토록 한 결과 노란 봉지의 피해율이 흰 봉지의 15분의 1에 그쳤다. 도쿄도는 "까마귀 퇴치의 회심작"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학습효과'가 뛰어난 까마귀에게 인간의 지혜가 언제까지 통용될지는 미지수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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