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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장군 우막이 은거…권력·부 탐하지 않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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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구직할시남구상인동일-. 행정구역상으로는 시에 소속되어 있지만 전혀 도시다운 분위기를 느낄수 없는 한적한 시골마을.
대덕산기슭 천년노송이 바람에 휘어지는 아늑한 분지에 1백60여가구 단양우씨 8백여명이 한가족처럼 오순도순 산다.
인향조는 고려말 정략장군 우막. 그는 공양왕때 예조정낭등을 역임하다 조선개국후 전라도에 유배되어 장살당한 우홍명의 손자를 정도전등 쿠데타주체세력의 보복을 피해 이마을에 은신했다.
정치권력이란 한낱 뜬구름 같은 것 때문에 그는 후손들에게『권력을 탐하지 않는 선비정신』을 당부하며 초야에 묻혀 살았다.
그의 가르침 때문일까. 이마을 출신중에는 권력의 정상에서 세도를 부린 인물도 천석의 부를누린 갑부(우무천석)도 찾아보기힘들단다. 진사급제자가 8명, 현감이상 관직에 등용된 인물이 24명. 「양반」의 신분을 지키는것으로 충분했다.
임신왜란때 대구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 선무일등공신에 오른 우배선(호·월곡)은 이마을이 배출한 명현.
『월곡은 이마을 우씨가문에서는 신화적인 존재지요. 임진난때 유격대장으로 종횡무진 전장을 누빌 때 갑자기 왜군의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지자 그의 애마가 무릎을 꿇어 주인을 구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통한 것은 그 몇해후 월곡어른이 돌아가시자 이 말이 식음을 전폐하고 구술프게 울다가 3일만에 죽었다는 겁니다.』
후손 우억기씨는 『이 의마의 순사는 결코 구전되는 전설이 아니라 월곡공의 창의록에 엄연히 기록된 역사적 사실』이라고말한다. 일제초까지만 해도 마을야산에의 마총이 있었는데 일제말 저수지확장공사로 수몰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이마을은 지난81년 시로 편입되었으나 주소득사업은 예나다름없이 농사와 목축업. 가구당 연평균 소득은 4백여만원.
마을중앙 울창한 수목사이에 단청을 드리운 낙동서원은 역동우도과 그의 수제자 신현, 그리고 우길생·우현보·우배선등 명현들의 위패를 봉안한곳. 지난63년 후손 우둔식·종묵형제가 사재를 털어 건립, 이지방 유림과 후손들이 봄·가을로 제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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