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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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서른다섯번째 제헌절을 맞는다. 48년7월17일 자유와 민주주의를 기본이념으로한 헌법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수 천년을 내려온 비제왕정과 결별하고 사상처음으로 현대국가로서의 기틀을 갖추게되었다.
비록 분단된 상태로나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선언한 헌법에 바탕해서 새공화국을 출범시킨 그때의 감회는 아직 새롭기만 하다.
그러나 35년에 불과한 우리의 헌정사는 만신창이가 될만큼 시련과 형극의 대상이었음은 국민 누구나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의 헌법은 무려 여덟 차례나 중단과 개정의 기복을 겪어야했다.
국가의 기본법이며 최고의 보장법인 헌법이 이 같은 수난과 곡절을 겪은 것은 집권자의 권력에 대한 집착에서 연유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신생 한국에 그만큼 많은 문제와 고민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유럽에서 생성·발전된 것이지 우리의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헌법이 수난으로 얼룩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이 민주시민으로서의 훈련은 물론 아무런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마당에 불쑥 들어온 민주주의의 「충격」 을 스무드하게 소화하지 못한데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시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자신의 권리확보에 보다 적극적이었다면 권력자의 자의는 제약을 받았을 것이며 따라서 혜정중단이나 개헌과 같은 불행한 사태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우리나라의 특수한 여건을 감안해서 만든 제5공화국 ?법은 근대헌법의 필수적 기본원리인 인권보장과 권력의 제한에 있어 제3공화국 때보다는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인신보호를 위한 구속적부번의 부활, 형사피고인의 무죄추정, 엄격한 증거주의, 연좌제의 폐지 등은 이른바 유신헌법과 견주어 국민의 기본권을 크게 ??시킨 진취적 내용이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임기에 관한 한 개정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대통령의 임기를 7년단임으로 못박은 것은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해야 한다는 국민적 염원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의 새 헌법이 공포된 것은 오는 10월27일 3년이 된다.
아직 3년도 채 안된 새 헌법을 놓고 간헐적으로 개헌얘기가 그럴듯하게 나돈 것은 우리국민의 민주시민으로서의 의식이 성숙되지 못하고 정치풍토가 경직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있음을 드러내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항간의 개헌설은 대통령의 부인에따라 쑥 들어갔다. 최근 어느 여론조사결과를 보면 국민의 상당수가 헌법개정을 않는다고 한 정부의 약속을 믿는 것으로 되어있다.
물론 현재의 헌법이 최선의 것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제도나 법도 지고 최선일수는 없다.
미비한 조항, 보완할 점, 고쳐야할 대목은 있다. 그러나 집권연장을 위한 개헌은 있지도 않겠지만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정치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믿음의 결여에 있다. 정치인들이 철석같이 한 약속을 깨는 일이 비일비재한 마당에 국민이 정치에 대한 신뢰를 가질 까닭이 없으며 나아가서 민주한국의 실현은 요원한 과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새헌법에서 현직대통령의 임기는 절대로 고칠 수 없도록 못박았다. 그 어떤 약속도 이보다 더 무거울 수는 없다.
다른 조항 때문이라면 몰라도 만약대통령의 임기 때문에 개헌논의가 생긴다면 국가의 장래를 위해 불행한일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제 국민의 의식 속에 뿌리를 내렸다고 보아도 될 만큼 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지 누가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헌절은 헌법에 담긴 정신을 되새기고 이를 수호할 것을 다짐하는 날이다. 35년이라면 짧다고만 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 국민모두가 성숙한 시민정신을 기약하는 날로 이날은 기념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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